지지 않는 토론의 방식을 배워보자
선 글을 시작하면서 이 글의 방향을 생각하도록 하자.
말 그대로 토론에서 지지 않는 방법에 대한 글이다.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지지 않는 목적이다.
이걸 통해서 인터넷에서 말싸움을 해서 승리하라는 것은 아니고, 실제로 대학 토론수업이나 논쟁이 필요한 상황에서 쓸 수 있는 기믹 즉 수사학을 이야기 해볼것이다.
만약 본인 스스로가 스노비즘을 싫어하고, 소피스트를 싫어한다면 뒤로 가기를 누르면 된다.
하지만 착각하면 안되는게 지지 않는다는것이 이겼다는 의미가 아닐 수도 있으며, 이긴다는것이 옳다는것이 아닐 수도 있다.
1. 토론은 뭐야? 그게 왜 필요한데?
한국 사람들은 토론을 하면 자주 이런 소리를 한다. 실제로 내가 고등학생 때에도 토론을 주도하던 선생님이 “토론은 서로의 이해를 통해 합의점을 도출해 나가도록 하는거야. 그렇게 공격적으로 해서는 안돼.” 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토론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싸움이야. 하나의 결론을 내거나 합의점을 찾는것은 토의이다.
이건 기원전부터 키보드 워리어로 명망을 떨치던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왕이랑 국정을 논단하던 조선까지 어느 나라에서나 있어왔던 이야기다..
물론 모든 토론이 이 범주에 있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가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토론이라는 것은 대충 이런 느낌이다.
이런 토론들은 기본적으로 싸움이다.
토론을 영어로 debate이다. 이 단어에 대한 어원은 여러가지 설이 많지만,
결국 종합해보면 “싸우다.”가 그 어원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bate가 bat이므로 방망이를 뒤로 치우고 싸우다라는 뜻으로 얘기 하는가 하면 bate는 battle이다.
즉 싸움이다 등등으로 얘기가 나누어지지만 결국에는 마찬가지이다. 싸운다는 것이다.
이런 토론과 토의는 결정적으로 큰 차이가 존재하는데
승자와 패자가 존재한다. 물론 극단적으로 “너 100점, 넌 50점” 이런식으로 점수를 나누는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고대 아고라에서 부터 시작해서 현대 100분 토론까지 토론이란 패널들 끼리 사회자를 두고 싸움을 하며 이걸 평가해줄 청자들을 데리고 있다. 이를 통해 승패를 좌우하는것이다.
토론의 가장 큰 장점은 여론을 형성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 전문가가 될 수는 없다. 전문가끼리 치고 받고 싸우는 것(토론)을 보면서 그들의 논리 속에 어떤 부분이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를 이해하고 이를 통해서 그 패널의 주장을 자신의 주장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 즉 오피니언 리더의 주장이 내 주장이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사람들은 “저사람 말이 좀 맞는데?” 하면서 수긍하게 되고 이를 통해 여론이 형성되면 반대측 파벌보다 더 강한 입김을 작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작게는 작은 공동체 부터, 크게는 국가의 국정까지 좌우할 수 있게 된다.
이게 토론인 것다.
한번 지난 대선 토론중 일부를 가져와보았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스스로 사고를 할줄 알고 좋은것과 나쁜것을 판단할줄 안다면
토론을 저렇게 하는 문재인이 뽑고 싶은가? 그래서 뽑아 봤더니 나라가 어떻던가?
여기까지 요약
1) 토론은 싸움이다. 때문에 승패가 존재한다.
2) 토론은 패널(선수), 사회자(심판), 채점자(관중)으로 구성된다.
3) 토론의 승패는 여론을 좌우한다.
*위의 정의들은 아래에 쓸 글을 위한 일종의 공리이므로 본래의 사용과 차이가 날 수 있다.
2. 근데 수사학이 무슨 필요야?
승패가 존재하고 이게 여론이 된다는 얘기는 상대측 패널을 설득하는 작업이 아니라 이걸 보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여기서 웃긴것이 나온다. 이 작업에서 실패한 대다수의 인간들이 들고 나오는 소리다.
“꺄아아아악! 미개한 국민성 보세요! 이 나라는 딱 독재가 어울리는 국가라니까요?” 라는것이다. 이를 간단히 표현하면 ‘국개론’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 개새끼 론’
본인이 설득을 실패한것을 청중의 수준으로 돌려버린다. 농담같은가?
20대의 지지율 하락 이유는 못배워 먹어서라고 한다. 20대 남자 개새끼론인 것이다.
사람들에 대한 설득이 실패하면 상대를 욕하고 본다? 웃기는 일이다. 그건 설득에 실패한 본인들의 탓이지, 국민의 미개함을 탓하기 전에 본인들의 주장이 왜 사람들에게 통하지 않았는지를 생각해야 하는거다.
이게 그냥 국민이 미개하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이다.
왜 사람들에게 자신의 주장이 통하지 않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전원책 변호사의 토론한 부분을 가져왔다. 여러분들은 이 분의 말씀에 설득이 되고 공감이 되는가?
이게 바로 수사학이 필요한 이유다.
아무리 내가 회의적인 마인드와 이과형성향을 가지고 “나는 검증 안된건 믿지 않음 ㅎ” 철철히 따져도
대다수 국민이 감성팔이에 취약한 문돌이인 것 처럼 사람들은 인문학에 의해 좌우될 수 밖에 없다.
나치당도 아닌 일반 국민들도 괴벨스의 선동에 넘어가 하일 히틀러를 외치며 전의를 다지곤 했다는 것을 떠올리자
<희대의 선동가 괴벨스>
제군들! 전쟁을 원하나?
그럼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을 하자!
위 동영상은 괴벨스의 독소 총력전 연설에서 국민들이 나치의 선전선동에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이다.
어디 중2병 새끼가 할 만한 소리가 사람들이 받아들여 열광하고 소리치고 있다.
근데 나치당원도 아니고, 군인도 아닌 일반 시민들이 그것도 대전 후반기에 접어든 마당에(이중전선은 붕괴되고 망하기 직전) 그의 연설에 박수를 치고 그의 말이 끝날 때 마다 일어나 나치식 경례를 하며 종국에는 ‘지크 하일!’ 하고 외치고 있다.
물론 이건 토론은 아니다. 하지만 토론은 이래야 한다. 사람들을 휘어잡을 수 있어야 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대답을 주고 그들을 끌어들일 수 있어야 한다. 어찌보면 비이성적이지만 최종적으로는 토론의 궁극적인 승리다. 이게 잘못되었다고? 하지만 중요한 건 승리이고 실제로 이런 토론들이 결국 여론을 움직이고 승리를 이끌어내게 된다.
위의 영상은 버니 샌더슨의 민주당 4차 토론의 하이라이트이다. 물론 하이라이트니까 짜집기 하면 멋진 장면이 당연히 나올 수 밖에 없겠지만, 그건 중요한게 아니고, 내가 하고싶은 말은 바로 샌더슨이 보여주는 행위들이다.
그의 말은 매우 힘있고, 논리적으로 들리며, 그의 제스처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이 외에도 다른 영상들 중 오바마의 연설이나 토론에서 그가 보여주는 제스처와 표정, 그리고 목소리의 강세들을 보면 매우 힘있고 딱 부러지며 조리있게 말함을 알 수 있다.
오바마의 경우 그의 연설이나 토론을 보면 정말 좋은 이유가 그가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말을 끊고 힘을 주는지를 보는건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정말 그는 사람들에게 호소력 있는 목소리와 제스처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수사법을 가지고 있다.
호소력이란 매우 중요한거야.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이라고 무시하면 안되는 것이다.
때문에 토론에서 호소력은 논리와 논거 다음으로 중요하거나 혹은 둘을 차치하고 가장 중요한 축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바로 수사학의 필요성이 생것이다.
토론을 보는 사람들이 내가 상대 패널을 압도하고 있고 내 논리가 옳다고 보여지게 하는게 중요하다는거다.
논리와 논거 역시도 타당하다면 금상첨화인것은 생각 해볼 것도 없다..
-요약-
1) 토론의 승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내 의견에 동조시키는 것이다.
2) 사람들을 내 의견에 동조시키려면 내 말에 호소력이 필요하다.
3) 호소력은 내가 얼마나 논리적으로 보이며 상대를 압도하고 또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먹히는가 하는 것이다.
*호소력의 정의 역시 이 글에 국한 된 정의임을 밝혀둔다.
3. 그럼 수사학이 뭔데?
수사학(修辭學)은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문장·사상·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수단들을 선택하고 그 이용 수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서구에서 ‘수사(rhetoric)’는 본래 청중을 앞에 둔 사람의 웅변술을 뜻하는 것으로, 어떤 생각을 특별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기술(art)을 의미했다. 이는 표현과 설득에 필요한 능란하고도 다양한 방식에 대한 숙달을 뜻하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수사학 [Rhetoric]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1. 30., 국학자료원)
버니 샌더슨이나 오바마의 연설이나 토론에서 보여주는 악센트, 손짓 등등의 필요성을 수사학이 왜 필요하냐에 집어넣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수사학은 굳이 논리적인 접근이나 우리가 흔히 레토릭 하면 생각하는 때스는 토론기법들을 떠나서 상대에게 자신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전달하여 설득할 수 있는 수단이다.
문제는 이게 소피스트들에 의해서 일종에 승리하기 위한 말싸움의 도구로 변질되어 레토릭 자체의 의미가 변질되어 버린 거다.
소피스트라고 하니 잘 이해가 안간다면 이철희(무적논리)나 진중권, 김갑수 등을 떠올리면 된다.
물론 무조건 레토릭으로만 승부를 보는 타입은 아니다. 그게 유명하게 퍼져서 그렇지.
저도 OOO이(가) 문제가 없다고는 생각 안해요.
그~러~나~
이걸 OOO 개인의 문제로만 봐야 하느냐?
전 꼭 그렇게만 볼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애초에 이 OOO를 만든 장본인이 누굽니까?
지금 집권여당의 전신들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현 정부와 여당에게도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 이렇게 봐요.
-이철희 무적논리-
위의 이철희 무적논리는 일종의 국면 전환용이다. 자신에게 불리한 주제 혹은 패널의 주장이 나왔을 때 그것을 넘기기 위한 방법이다.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이제부터 우리는 이러한 문장을 이용한 혹은 말을 이용한 방법을 통해 대학 토론 혹은 인터넷에서 어떻게 써먹을 수 있는지를 확인해 보려고 한다.
-요약-
1) 수사학이란 상대에게 내 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다.
*역시 이 본문에만 해당하는 정의이다.
4. 그럼 본격적으로 토론을 해보나?
토론을 하기에 앞서 자신의 말투를 한번 체크해 보자
하지만 토론에서의 자신의 말투와 일반적인 자신의 말투는 전혀 다르거다. 때문에 토론을 실제로 해보고 그에 따라서 자기 말투를 교정하는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럴 시간적 여유도 없고 귀찮다 싶다면 술자리에서 친구들과 가끔 언쟁이 생겼을 때 자신을 떠올려봐.
심장이 막 두근거리고, 말을 뱉기는 하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것이다.
그걸 고쳐야 한다.
그럼 이걸 언제 고칠 수 있을까? 대학생이면 술자리에서 많이 고칠 수 있다. 대학생들 술자리에서 약간의 논란이나 정치 얘기가 나올 때 거기서 네 의견을 타진하는것이다. 물론 대깨문처럼 스탠스를 너무 빡세게 잡고 갔다간 개막장이 될 것은 분명하니까 나는 흥분하지 않고, 또 상대의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으면서도 대화할 수 있도록 하는거다. 여기에 덧해서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도 공격적으로 보이지 않으면서 본인 스스로 문제가 되지 않도록 의견을 타진하는 방법을 배우는거다.
이걸로 토론 연습이 되겠냐고? 물론 된다.
그러나 패널만 있는 곳에서의 토론 또한 친구들과 있는 곳에서의 토론은 실제 관중이 있는 곳에서 하는 토론과는 다르지만, 자신의 어조를 신경쓰고 다듬을 수 있는 상태가 되면 그 이후로는 자신을 신경쓰면서 조용히 얘기를 진행해 나갈 수 있을거다.
말이 막 나오고 심장 두근거리고 말 빨라지는거 고쳤나?
내가 추천하는 방법은 3인칭으로 바라보기이다. 토론하는 날을 패널에서 바라본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감정을 컨트롤 할 수 있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다.
그럼 두번째로 말을 정확히 하는 연습을 하는거다. 아나운서 처럼 또박또박 할 필요는 없지만 상대에게는 들리도록 하면서도 목소리가 높아지지 않게 하는게 중요하다. 말이 빨라지면 톤이 높아지는데 듣기 힘든게 여기서 나온다. 물론 자기 목소리가 새소리라는 애들도 있지만 이건 그런 목소리의 높아짐이 아니라 흥분상태가 아닌 명정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주변인에게 보여주도록 하는거다.
인터넷에서도 익명속에 씨발씨발 하면서 욕하다보면 정말 개빡쳐서 계속 지랄하게 되는거를 자주 보는데, 근데 욕 안쓰고 평정심 유지하면서 쓰게 되면 상대보다 훨씬 논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누군가 이걸 봐주는 관객이 있다면 논리적으로 답변하는 네 쪽에 손을 들어줄 소지가 높다.
요즘 뉴스 덧글에 보다면
문재앙 좆됐다아~~~~~~~~~~~~!!!!!!!!!!!!!!!
다 알려졌다~~~~~~~~!!!!
이제 빼박! 빼박이다~~~~~~~~~~~~~!!!!!!!!!!
이런식으로 글을 작성하는 경우가 많은데, 누가봐도 매우 글이 난잡해 보이고 성의도 없어보인다. 또한 논거가 부족하고, 문장부호도 쓸데 없이 많이 사용되는 데다가 굳이 유행어를 사용해서 그렇지 않아도 매끄럽지 않은 문장구성을 더욱 난잡하게 만든다. 한마디로 보기가 싫다.
저런거 쓰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기초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세대인 것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다고 볼 수 있겠지만…
-요약-
1) 토론하기 전에 말투 혹은 댓글을 쓸 때 문장력을 우선 확인하자.
2) 말이든 글이든 병신 같으면 호소력이 떨어진다.
5. 그럼 이제 토론을 시작해 볼까?
주제: 소득주도성장은 실패했는가?
패널1: -실패한 정책이 아니다-
패널2: -실패한 정책이다.-
이런 주제로 토론을 한다고 생각해보자.
사: 소득주도성장은 다수가 실패한 정책이라고 얘기되고 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시기에 문제일뿐 기다려 달라는 말에 의견이 일고 있는데요. 이에 대해서 두 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인사 중략-
사: 발언 시간은 각각 2분이며 반대측 의견부터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기본적으로 소득주소성장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를 판가름 할 수 있는것은 지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문재인 임기는 아직 절반도 채 되지 않았으며 단기간의 최저임금 인상의 부작용이라고는 하지만, 이 것이 우리 경제가 감내하는 순간이 지날때 까지 지켜 봐야합니다. 지금 상태에서는 지금의 이 정책의 실패 가부를 따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문재인 정부 이후에 “소득주도성장으로 인해 국민들 다수의 불만세력이 생겼다.” 또는 “소득분개 개선으로인해 저소득층의 실질적 삶의 개선이 있었다.”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정책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해당사건이 종료되지 않은 시점에서 평가를 한다는 것은 잘못되었…
2. 지금 1은 순환논증 오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종료되지 않은 사건이기 때문에 입증할 수 없어서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한 순환논증 오류에 해당합니다.
1. 제가 지금 얘기하고 있습니다.
2. 잘못된 논거를 들어서 주장하고 있으니까 지금 제가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신이 없는 것을 증명할 수 없으니 신은 존재한다라는 식의 주장과 다를바 없습니다.
애초에 소득주도성장은 성공할 수가 없다. 이건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사항이다. 근데 이걸 옹호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걸까? 당연히 논거 자체를 새로 만들어 낼 수 밖에 없다.
소득불평등이 개선되기는 커녕 실업률이 후퇴하고 있는 가운데, 시간을 더 준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근본없는 사이비 경제학에서 시작한 이야기이며, 소득은 결과이지 출발이 되어서는 안된다.
1은 이 주제에 대해서 “원천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잘못된 것을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라는 논거를 들고 나온거다. 명백한 순환논증 오류가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상대의 주장을 바로 지적해줘야 한다.
가끔 자기 차례도 아닌데 난입해 들어가서 얘기하는 패널들을 본 적이 있을것이다. 이는 관중의 뇌리에 그 자의 주장에 따른 논거가 논리적 오류에 기인해 있음을 알리기 위함인데. 이걸 기다리고 있다가 나중에 들어가게 되면 사람들의 기억에서 흐릿해 지기 때문에 주장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잊게 되어버린다.
때문에 주장 도중에 난입해서 얘기하게 되는것이다.
또한 2번 패널은 1번 패널의 논증오류를 지적하면서 꽤 ‘순환논증 오류’라는 어휘를 사용했다. 어휘 자체가 고급스럽게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호감이 생길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부득불 사용한 것일 수도 있고, 딱히 대체할 단어가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에 썻을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어휘가 고급스러울 수록 사람들은 믿음을 갖는 경우가 많아.
*하지만 까딱하고 잘못썼다간 무식한 사람으로 찍히는 수도 있다
※순환논증 오류.
결론을 가지고 전제를 구축하는 방법이다.
간단하게 이걸 설명하면
행인 : 꼬마야 주유소는 어디에 있니?
꼬마 : 주유소는 편의점 옆에요
행인 : 편의점은 어디에 있니
꼬마 : 주유소 옆에요
지지 않아도 목적은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 왜냐고? 당연하잖아?
논란거리로 남아있으면 누구도 승리하지 못한게 되므로 논란거리는 계속 논란거리로 두는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상대가 완벽한 주장이나 근거로 논파할 수 없는 근거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고, 때문에 이런 패배 가능성이 높은 토론에서는 위와 같이 순환논증 오류나 논점절취상의 허위를 통해 토론을 지지않게 만든다.
-요약-
1) 지지않는 토론은 지지않을 논리적 오류를 통해 시작된다.
2) 순환논증 오류나 논점절취상의 허위등을 이용해서 내가 패배하는게 마땅한 주장을 ‘패배하지 않게’ 끌어내서 흐지부지하게 만들 수 있다.
3) 왜 패배하지 않는 질질끄는 토론을 하는가? 그건 명확하게 결론이 나지 않은 토론은 논란거리로 남아있게 함으로써 약점이 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6. 그래서 수사학이 우리 삶에 쓰이기는 하는거냐?
여기서 적는 수사학은 실질적인 수사학의 범위에서 보자면 매우 보잘것 없고 또한 이를 직접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전부 논리적 오류야.” 라고 할 법한 것들이다. 하지만 내가 처음 시작하는데 앞서 ‘만약 본인 스스로가 스노비즘을 싫어하고, 소피스트를 싫어한다면 이 글은 접어두고 나가는게 좋다’ 라고 했던 것은 이 글의 방향은 말 그대로 소피스트식 궤변에 가까워질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선 이쪽 방면에서 조금 관심이 있다면 들어봤을 ‘쇼펜하우어’는 어땠을까?
쇼펜하우어는 사실상 자신과 대화하는 소피스트들에게 이골이 난 상태였다. 그래서 이들을 까기위해 일종의 자조성 글을 쓴 것이 지금 우리가 흔히 ‘토론의 법칙’이라 부르는 책이 되었다. 때문에 쇼펜하우어 스스로 토론하면서 느낀 혹은 상대에게서 당한 짓거리들을 모아 쓴 것이 바로 ‘토론(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이라는 글이다. 앞서 말한 토론의 법칙이 바로 이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 ‘토론(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의 검색을 통해 각 항목들을 읽고 왔다면 이런 생각이 든다.
“야 이런건 키배 뜨거나, 아니면 급식충 새끼들이나 써먹을 것들이고, 실제로 일반인이 쓸 일은 없잖아? 근데 너는 토론에 직접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며? 이걸 어디에 쓰냐?”
물론 지금 나는 학생이고 직장 생활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의외로 회사들에서는 토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아이템이나 사업의 방향을 의논할 때에도 그냥 서로간의 합의를 통해서 잘 굴러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선은 각 부서별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 시키고 싶어하는데다가 어떤 면에서는 본인들에게 해가 가는 일이 있으니까 최대한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사업을 진행시키고 싶을것이다. 또한 자신들이 내놓은 아이템이 다른 부서에서 태클을 걸어오는 경우도 있다.
인기만화 미생을 본사람들이라면 알 것이다.
가령 우리학교 모 교수님은 본래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매우 높은 직위를 가지신 분이다. 근데 이 분이 말하기를 “예전에는 대충 서로 으쌰으쌰 하면 넘어갈 일들이었는데 요즘은 얼마나 득달같이 달려드는지…” 하는 식으로 근래에 어떤 일을 하더라도 반발이 심하고 토론을 떠나 거의 난동 수준으로 싸우는 경우들도 허다하다는 얘기를 한다. 또 모 은행에서는 근래 일부러 논쟁이 생기도록 임원들 끼리 제비뽑기로 어떤 안건이 나오건 반대입장을 내는 인원을 꼭 만들어 넣어서 그동안의 합의 방식이 아니라 토론 방식으로 은행을 이끌어나가고 있다.
이건 다른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다들 논쟁을 통해 소통하고 이를 통해서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다들 토론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가 한국에도 슬슬 정착하고 있다는거다. 한국의 기업문화는 일본과 매우 닮아있었다면, 지금은 외환위기 이후 지속적으로 변화를 꽤하면서 사내 분위기를 이 전의 군대식 문화에서 토론식 문화로 바꿔나가고 있는것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학생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갈 즈음이면, 상대를 설득하는 작업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지게 될 거다. 두 집단이 토론을 통해 그걸 관전하는 임원들을 설득해야 것이다.
-요약-
학교 뿐 아니라 여러분야에서 사용 됨. 근래에는 회사들에서도 토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현상.
7. 그래서 수사학이 실질적으로 어떻게 사용되는데?
다시 이철희의 무적논리를 살펴보도록 하자.
저도 OOO이(가) 문제가 없다고는 생각 안해요.
그~러~나~
이걸 OOO 개인의 문제로만 봐야 하느냐?
전 꼭 그렇게만 볼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애초에 이 OOO를 만든 장본인이 누굽니까?
지금 집권여당의 전신들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현 정부와 여당에게도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 이렇게 봐요.
-이철희 무적논리-
이철희의 무적논리라는 것을 조금 분해해서 생각해보자.
A는 P(problem)에 포함된다.
하지만 A=P가 아니다.
G(government)=P이다.
그러므로 G는 A를 포함한다.
이게 이철희의 무적논리를 간단하게 풀어본것이다.
A는 P(problem)에 포함된다. (A는 문제가 좀 있다.)
하지만 A=P가 아니다. (하지만 A는 문제 그 자체는 아니다.)
G(government)=P이다. (G는 문제 그 자체이다. 혹은 G는 문제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G는 A를 포함한다. (때문에 A의 잘못은 G에 포함된다.)
이런 얘기지. 결국은 이는 “A의 잘못 자체는 인정이 되나 그것을 만든 것은 G이므로 G가 문제이다.” 라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간단하게 놓고보면 이제 얘기가 쉬워진다.
*이런 기호학은 대학교에 이산수학이라는 과목이 있다. 컴퓨터공학과에서 알고리즘을 짜기 위해서 배우는거다
근데 이상하지 않는가? G=P이다라는 근거가 대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위의 논리의 맹점이다. 대체 왜 G=P인가에 대한 근거가 빠져있다. 물론 이후 논지를 전개하면서 “G=P이다.”가 왜 성립하는지를 이철희 소장은 논변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 자체가 무적논리는 아닌것이 위에 간단하게 써 놓은 것 처럼 G=P라는 근거가 존재하지 않으면 애초에 논리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므로 이건 무적논리가 아니라 논거가 없다면 논리적 오류에 해당하게 되는거다
즉 위의 논리라는 것은 논리라기 보다는 다시 말하지만 국면의 전환것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하기 위해 미리 포석을 깔아두는 것에 불과하다.
A라는 문제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데, 이것을 A에서 G 쪽으로 돌리고 싶은거다. 그럼 어떻게 해야하지? A와 G의 연계성을 찾아야 하는것이다. 그럼? A의 문제가 A 뿐 아니라 G에 연관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P를 통해 둘을 연관시키는 거다
예시를 좀 들어볼까?
저도 문재인 대통령에게 아예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분명 어느정도 증명이 된 상황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의혹이 나온다면 의혹을 제기하는 당사자들과 직접적으로 소통을 해서 그들의 요구 부분을 확인하고 그를 통해 수용하는 과정을 갖춘 후 이후에 더 이상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다시 한 번 증명과정을 거치면 되거든요.
하지만 이게 문재인 대통령의 잘못만 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사실상 이 문제는 정치권에 대한 불신의 팽배 혹은 인터넷의 질 낮은 문화와 관련이 있고, 이건 사실상 이런 분위기를 조성한 이전 여당과 박근혜 정부 그리고 현 정권의 잘못인거죠.
소통의 부재를 계속적으로 하고 있으니까 소통이 되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불만을 표출하게 되는거 아닙니까? 문재인 대통령 역시도 어느정도의 잘못은 있지만요. 이건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한 과거와 현 정부의 문제이고 이것에 대해서 책임감을 좀 가지고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철희 논리라는게 대충 이런거다. 위의 글이 장황하게 길어졌지만 결국 뼈대는 같다.
‘A의 잘못을 일정 인정하지만 그 잘못은 G가 만든 것이다.’ 라는 것이 기본 골자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효과적으로 토론 자체를 G로 돌려놓았다.
이철희 뿐 아니라 국면전환으로 이런 논리적 방법을 사용하는 일은 아주 많다.
결국에는 어떤 문제가 발생했고, 그에 대해서 쉴드를 치기 보다는 다른 방향으로 화제를 전환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고 있는거다.
근데 왜 이렇게 화제를 전환하려고 하는걸까?
위의 다큐는 손석희의 킹메이커 -네거 v 티브 전쟁-이다. 물론 여기서는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에 대한 얘기 때문에 이런 얘기가 나오는 것이지만, 이건 토론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참고로 조지 레이코프 교수는 틀딱들이 자주 사용하는 “프레임”을 처음으로 정의한 사람
즉 이철희의 무적논리는 2가지에서 아주 효과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1. 국면을 전환하여 상대에게 끌려가는 토론을 피할 수 있다. (즉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을 피할 수 있다.)
2. 화제를 전환하여 청자를 환기시키고, 이를 통해 불리한 내용을 희석시킬 수 있다.
이것이 나쁜거냐고 물어 본다면 “저런 지저분한 수가 무슨 소용이냐! 아주 더럽고 역겨운 수다!” 하겠지만 실제로는 직접적으로 토론할 때에도 매우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고. 애초에 내가 이길 수 있는 확실한 토론이 아닌 이상은 양측이 비슷하거나 혹은 내가 불리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 국면전환을 통해 다른 얘기로 돌려버리는 편이 가장 좋다.
가령 광산에 대한 지속 및 폐쇄 토론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A측은 광산을 지속해야하고 B는 폐쇄해야 한다고 토론이 시작된다. A는 광산을 유지해야 자기 부서가 밥벌어 먹고 살고 눈치 안보고 사는데, B는 이 광산 때문에 지들이 추진하는 C라는 광산의 개발이 늦어져서 빨리 광산을 폐쇄하고 다른 광산으로 넘어가고 싶어한단 말이다.
이에 대해서 A가 광산을 지속해야 하는 사업성, 필요성을 열심히 설파하는데 B가 사업성과 필요성을 반박했다. 솔직히 이건 이길 방법이 좀 없을 것 같다. 그걸 지켜보는 투자자나 임원들은 “흠… 역시 B의 말이 맞는 것 같은데…” 하고 넘어가려 한다? 어떡하지?
이때 쓰면 된다.
A는 자신이 공격당하는 사업성 필요성에 대해서 반박하기 보다는 일정부분 인정하고 바로 B의 C광산에 대한 문제로 시점을 옮기는거다. 아마 이런 식의 대화가 될것이다.
A: 예. 맞습니다. 현재 광산의 수익은 조금씩 줄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까 말한 C광산의 금은광산에서 금은 외에 구리로도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것 역시 수익성 관련해서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B: 아닙니다! 구리에도 충분히 경제성이 있습니다!
A: 그럼 거기에서 구리를 처리하는데 드는 비용 증가는 어떻게 하고요?
하고 국면을 전환한다. A의 주장에 B가 반박하므로써 A의 광산수익 문제는 넘어가고 B의 구리 경제성의 이야기로 넘어갔다.
하지만 여기서 A가 “하지만 우리 광산은 수익이 보장되어있다” 하면서 뒤에 말을 붙이면 어떻게 될까?
A: 예. 맞습니다. 현재 광산의 수익은 조금씩 줄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까 말한 C광산의 금은광산에서 금은 외에 구리로도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것 역시 수익성 관련해서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서 우리 광산의 수익은 매우 안정적입니다.
B: 안정적인게 아니라 서서히 줄어들고 있지 않습니까!
A: 하지만 그 추이는 매우 긍정적입니다.
광산 수익문제에서 내용이 넘어가지 않고 B의 주장이 계속 이어지면서 다시 A측 주장에 대한 반박이 이루어지게 되는거다. 이게 지속되면 A의 광산은 수익성에 문제가 있구나 하고 그걸 보는 청자들에게 인식이 된다. B머릿속엔 승리, 광산폐쇄, 성공적
정치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사회문제에서도 마찬가지고, 어느 분야건 가릴 것이 없다.
2) 그럼 이철희 무적논리는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데?
이미 나와있다. 상대가 국면을 전환하려고 한다면 국면을 전환하지 못하게 막으면 끝난다.
A: 예. 맞습니다. 현재 광산의 수익은 조금씩 줄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까 말한 C광산의 금은광산에서 금은 외에 구리로도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것 역시 수익성 관련해서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B: 일단 C광산의 얘기는 나중으로 밀고요. 우선 현재 주제인 광산 수익 문제를 제대로 검토를 하고 넘어가도록 하죠. 방금 수익이 조금씩 줄어들어가고 있다고 하셨죠?
끝.
저도 문재인 대통령에게 아예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분명 어느정도 증명이 된 상황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의혹이 나온다면 의혹을 제기하는 당사자들과 직접적으로 소통을 해서 그들의 요구 부분을 확인하고 그를 통해 수용하는 과정을 갖춘 후 이후에 더 이상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다시 한 번 증명과정을 거치면 되거든요.
하지만 이게 문재인 대통령의 잘못만 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사실상 이 문제는 정치권에 대한 불신의 팽배 혹은 인터넷의 질 낮은 문화와 관련이 있고, 이건 사실상 이런 분위기를 조성한 이전 여당과 박근혜 정부 그리고 현 정권의 잘못인거죠.
소통의 부재를 계속적으로 하고 있으니까 소통이 되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불만을 표출하게 되는거 아닙니까? 문재인 대통령 역시도 어느정도의 잘못은 있지만요. 이건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한 과거와 현 정부의 문제이고 이것에 대해서 책임감을 좀 가지고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니 의혹제기 소통에 대한 문제는 그쪽 분들이 알아서 하시고요.
의혹제기가 나올 수 있는 근거들도 있고, 어중이 떠중이들이 떠드는게 아니라 말 그대로 그 분야 전문가가 들고나오는 얘기잖습니까? 그것에 대해서 얘기를 해야한다는 거죠. 그냥 서로 딱 밝히고 끝내면 되는 문제인데 이걸 왜 안하느냐는거에요.
3) 어휘를 고급스럽게 구사하기.
또 다른 스킬도 있다. 잠깐 언급했지만 어휘를 고급스럽게 구사하는거다. 이게 왜 중요하냐고? 어느나라건 말을 고급스럽게 구사하는 사람은 애초에 믿음이 가게 마련이다.
<못생긴 새끼 보다는 잘생긴 새끼가 낫다고.>
길을 가는데 존나 잘 차려입은 남자가.
“저기 길 좀 물어보려는데… A로 가는 길을 좀 알려줄 수 있을까요?”
하면 아마 굉장히 친절하게 길을 알려줄거야. 뭔가 존나 멋있는 사람 도와줬다는 기분에 어깨도 으쓱으쓱할거다.
근데 이번에는 무슨 좆거렁뱅이 새끼가 나타나서
“내가,,,,,,,, 길을,,,,,,, 잘,,,,,,,,, 모르겠으니,,,, 길 안내 좀,,,,,,, 해봐라~~~~~~!!!!!!!!!!! 카악, 퉷~~~~~!!!!!”
하면 “뭐야 이 씨발새끼는.” 하고 쌩까고 지나가겠지?
매우 조악한 비유이지만 결국은 마찬가지다.
상대의 어휘가 고급스러울 수록, 어투가 깔끔할 수록 상대에 대한 호감도가 오를 수 밖에 없고 당연히 토론에 있어서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토론에서 막 흥분하면서 “어? 왜그럼? 내 글 인정하는 부분? ㅇㅈ? 어? ㅇㅈ ㅆㄹㅇ?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토론 캐리하는각 ㅇㅈ? ㅇㅇㅈ 앙 기무띠♥ 이거 이해 못하면 바로 영정각 ㅋ 내가 찾아서 안드로메다 저승행으로 고속도로 미는 부분 ㅋㅋㅋㅋㅋㅋ 꼽으면 말빨로 이겨보셈 앙? 안들림~!” 하면 그 사람에 대한 호감 혹은 믿음이 사라질것이다.
1. 토론시에는 흥분하면 안된다.
2. 어휘는 되도록 고급스럽게.
3. 말투는 자연스럽고 빠르지 않게.
이건 꼭 지켜줘야한다. 물론 흥분하면 말이 막나오고 말이 막 나오다보면 자연스럽게 말이 빨라지고 그럼 더 흥분하고 말이 더 막나오고… 이런 상황을 겪게 되니 저 세개는 같은 얘기가 된다.
또한 말을 현학적으로 하는 것과 동시에 상대가 알아처먹지 못하게 해서 어리벙벙하게 하는 방법도 있다.
솔직히 이건 상대승리방법 보다는 이미 확정된 승리를 극대화 시키는 것에 해당하는 방법이다. 다시 말하지만 관객이 토론에서 내 말에 신뢰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게 중요하고. 그 과정에서 패널을 “개처발랐네?” 하는 느낌이 들도록 만드는데는 고급 어휘의 사용을 바탕으로 상대를 밟는거다.
A: 방금 말씀하신 것은 일단 기본적으로 자기 확증편향에서 비롯된 그릇된 논거에서 출발한 논변입니다. 논거가 잘못되었는데 논리가 제대로 될 수 있을리 없겠지요. 또한 패널은 지속적으로 선결문제의 오류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A에 관련된 대화는 선후인과의 오류이고요.
B: 에?
A: 더군다나 방금 말씀하셨던 B라는 단어의 이용은 재정의의 오류 수준이었습니다.
B: ???????????????
말을 못알아 처먹으니 대답도 못하지. 이걸 보는 관객들은 “뭔 개소리야? 알아 들을수가 없네.” 라고 하기 보다는 아마 “야 똑똑하네?” “저새끼 반박 못하고 벙쪄 있는거 보소 ㅋㅋㅋㅋㅋㅋㅋㅋ” 할것이다.
그러나 이건 내가 승리한 이후에 하는 방법이다. 만약 비등한 상황이거나 내가 지는 상황이거나 혹은 단어 의미도 잘 모르는데 떠들거나 하면? 개처발리고 병신취급 받을 수 있다. 그야말로 스노브 취급을 당하는것이다. 아마 하나하나 단어 짚어가면서 “너 이거 말 뜻은 알고 사용하는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하지만 굳이 이 현학적인 단어들이 저런 방식으로 공격적으로 쓰이는 것 뿐만은 아니다.
주장에 조금씩 담아준다면 굉장히 좋은 양념이 되기도 한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전반의 논변에서 맥락을 통해 해당 언어의 뜻을 유추할 수 있도록 하면서도 대화 자체에 핵심적인 단어를 포함함으로써 사람들의 집중도도 얻을 수 있기도 하다. 현학적인 단어라고 해서 무조건 나쁜것은 아니라는 얘기
4) 좋은 말이나 인용구 집어넣기.
실제로도 미국의 대선 토론이나 기타 사회 이슈에 대한 토론들을 보면 중간중간 성경이나 기타 유명한 철학자, 소설가 들의 말을 인용하는 경우도 많고, 명언들을 넣는 경우도 많다.
가령 어떤 상대 패널이 존나 감성을 팔아대고 있으면.
“감성팔이 좀 하지마 이새끼야. 씨발 개소리 하지말고 내용에 집중하라고.”
욕을 하겠지만
근데 그게 토론자리라면?
“감정에 호소하는 발언은 그만둬주십시오. 본질은 그런게 아니잖습니까.”
라고 할것이다. 근데 앞뒤 맥락에 따라서 감성팔이라고 깠다가 되려 청중에게 역풍 처맞는 경우도 왕왕 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청중을 설득하고 있는거다. 상대인 패널을 설득하는게 아니라는것이다.
이번에는
“이성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인생은 감성의 칼밭에서 최후를 맞이한다고 하죠? 그런 식으로 이성적이지 못한 얘기는 본질을 흐릴 뿐입니다.”
말이 한층 고급스럽게 보이고, 듣는 사람 입장에서도 나쁘게 느껴지지 않으면서 청중들 역시도 패널의 말에 좀 더 호감을 갖게 될거다. 이런 방식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너무 자주사용하면 중2병 걸린 새끼처럼 보이니까 적절하게 가끔 사용해야 한다.
8. 그래서 결론이 뭔데?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같지만. 결론은 단순하다.
토론은 앞으로 우리 삶에 있어서도 계속 사용된다. 그냥 아가리 파이팅이나 키배뜨는게 아니라 말 그대로 스스로 살아가면서 상대를 설득하고 혹은 논쟁하는 중요한 스킬이다.
기교에 해당하는 얘기 몇개를 잠깐 해보았다. 하지만 이거는 전문적인 서적에서 다루지 인터넷 글 잠깐본다고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이정도에서 마친다.
사람들이 토론은 “맞는말만 하고 팩트만 디밀면 승리 아님?” 이라는 식으로만 얘기해서 글을 쓰게 되었고 실제로도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도 많은 편이다. 나름 공부 좀 한다는 친구들 조차도 토론에 대해서 연습이 되어있지 않다면 “자료조사만 존나 해서 나가면 내가 승리하겠지?” 하는 식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상대가 토론을 어느정도 잘 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수백장 만들어간 자료를 하나도 쓰지 못하고 벙찐 얼굴로 화만 내다가 내려올 수도 있다.
팩트? 팩트는 중요하다. 근데 그 팩트를 스킬이 없는 사람이 들고 있고 상대는 스킬 만땅이지만 딱히 팩트가 없는 사람이라면? 처음에는 우세한 것 같지만 토론 중 후반에 들면 점점 상대의 말에 휘말려서 내가 하고싶은 말이나 내가 가져온 근거들을 제대로 내밀지 못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