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바다 : 포루투칼의 식민지, 그리고 베네치아(베니스) 상인
왜, 어떻게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을까?
지금은 인도와 중국이 잠에서 깨어나는 듯 보이고
그리고 서구의 독주 체제도 깨지게 될까? 아니면 다시 중국은 도강양회로 돌아갈까
지금까지는 왜 그렇게 독주 체제가 유지되었던 걸까?
왜 꼭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걸까?
1. 우리들이 갖고 있던 간단한 설명들의 큰 약점들
한국을 포함해 아시아의 몇몇 국가들이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런데 아직도 상당수의 사람들은
“동양은 유교 문화 때문에 발전이 막혔고 서양인들은 진취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결국 발전을 해냈다.” 처럼
문화, 정치, 인종적 특성같은 것들에 의해 원래부터 항상 그래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원래부터 그래야 했던 걸까?
사실 저런 식의 설명들은 원래 서양인들도 줄기차게 써먹었던 설명이다.
예를 들어,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같은 책이 바로 그것이다.
*왜 프로테스탄트(개신교)는 발전(자본주의)에 적합한 사상일까 하는 책이다.
현재에 와서는 많은 학자들이 그런 당연시되는 말에 이의를 제기한다.
동양은 정말 성리학 때문에 망했고 서양은 다른 정신을 가져서 성공한 걸까?
그 질문에 이언 모리스 교수는 Why The West Rules 책에서 이렇게 답을 한다.
Blaming all this on Zhu Xi would be excessive.
His philosophy did not cause Chinese elite culture to turn increasingly conservative; rather, cultural conservatism caused his ideas to succeed.
Zhu Xi thought was just the most visible element of a broader response to military defeat, retrenchment, and falling social development.
As the world turned sour in the twelfth century, antiquity became less a source of renewal than a source of refuge, and by the time Madame Zhou died in 1274 the sort of Renaissance spirit that might drive global exploration was sorely lacking.
So does the stagnation and then decline of social development after 1100 explain why Cortés, not Zheng, went to Tenochtitlán? Well, partially.
It probably does explain why there were no great voyages of exploration in the twelfth and thirteenth centuries. But by 1405, when Zheng’s first Treasure Fleet sailed from Nanjing, Eastern social development was once again rising quickly. The very fact that Yongle kept sending Zheng across the Indian Ocean indicates an expansive mindset. As social development surged upward again, fifteenth-century intellectuals started looking for alternatives to Zhu Xi thought.
The extraordinary Wang Yangming, for instance, tried hard to follow Zhu’s rules. In the 1490s Wang spent a week contemplating a bamboo stalk, as Zhu had recommended, but instead of providing insight it made him ill. Wang then had just the kind of epiphany appropriate for a successful, expanding society: he realized that everyone intuitively knows the truth without years of quiet sitting and studying commentaries on Confucius. We can all attain wisdom if we just get out and do something. Wang, as good as his word, became a new Renaissance man, ranking among the period’s top generals, administrators, editors of ancient texts, and poets. His followers, rebelling still more against Zhu Xi thought, proclaimed that the streets were full of sages, that everyone could judge right and wrong for themselves, and that getting rich was good. They even advocated women’s equality.
The decision to end Zheng’s voyages was in fact made not against a background of conservative retrenchment but against one of expansion, innovation, and challenges faced and overcome. There is little to suggest that a rigid, inward-turned mind-set cut off Chinese exploration in the fifteenth century while a dynamic Renaissance culture pushed Europeans across the seas.
“성리학(주자학)의 창시자인 주희에게 이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은 과도하다.”
당시 중국이 군사적으로 신나게 털리면서 잘만 꽃피우던 문명이 퇴보를 겪으니까 그에 대한 반응으로 사회가 보수화되면서 주희의 사상이 힘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인과 관계를 반대로 알고 있다는 거다.
주희때문에 중국이 보수화된 게 아니고, 중국이 보수화 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주희의 사상이 힘을 얻게 된거다.
또 동양의 사회가 진보하기 시작하는 15세기에는 왕양명이 나타났다.
양명학을 만든 왕양명이라는 사람은 주장하기를, 우린 모두 세상의 이치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 행동을 강조했다.
왕양명의 제자들은
1. 주희의 사상에 반대하면서 길 거리엔 모두가 현자이다.
2. 그리고 모두는 옳고 그름을 자기들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
3. 부자가 되는 것 또한 나쁜 게 아니고 좋은 거다.
4. 여성 평등 주장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원래부터 서양이 동양보다 무조건 잘 살았던 건 아니다.
문명의 발상지인 양쯔강 하류 지역의 중국인들은 오히려 영국보다 더 잘 살았다.
한편으로는, 상당수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동양, 특히 한국에 대해 창의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과연 정말 그런걸까?
오히려 아래 지표들은 정반대를 보여준다.
1. 동아시아는 오히려 특허 등록건수가 엄청나게 많다.
– 유럽 특허청, 일본 특허청에서 출원하고 미국 특허청에 등록된 특허들을 삼극특허라고 하는데
아래의 그래프가 보여주는 것처럼
인구 1억2천인 일본이 인구 3억2천인 미국과 삼극특허 개수가 비슷비슷하다
우리나라는 프랑스에 이어 5위를 차지하고 있다.
2.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나 미국의 공대같은 경우 아시아 비중이 절대적이다.
3. 어떤 자료를 봐도 IQ 평균은 아시아가 상위권을 꿰차고 있다.
이런 동아시아를 두고 과연, 창의성이 부족하다!! 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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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과거 동양의 과학 기술 수준이 무시할 수준이 아니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18세기 아이작 뉴턴이 찾아낸 것으로 알려진 ‘뉴턴 제1법칙’이 중국에서는 기원전 3, 4세기경부터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뉴턴 제 1법칙 : 물체의 질량 중심은 외부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일정한 속도로 움직인다.
“운동의 정지는 저항력으로 일어난다…저항력이 없으면…운동은 결코 정지되지 않는다. 이것은 소가 말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진실이다.” – ‘묵자’
안타깝게도 묵자를 시조로 하는 묵가는 중국의 역사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서양보다 2천 년 앞서 찾아낸 운동법칙도 묵가의 쇠퇴와 함께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잊혀 버렸다.
중국이 최초로 발명한 기술의 목록은 정말 길다.
이항계수의 배열 방법, 회전운동과 왕복운동을 서로 전환시키는 방법, 시계의 탈진기, 주철로 만든 쇠쟁기의 날, 식물학과 토양학, 피부와 내장의 반사 작용, 종두법을 비롯해 현대 과학기술의 거의 모든 것과 직접 또는 간접으로 연결된 많은 것이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근대적인 농업, 조선, 석유산업, 천문대, 음악, 십진법, 지폐, 우산, 성냥, 릴낚시, 일륜차, 다단 로켓, 총, 수뢰(水雷), 독가스, 낙하산, 열기구, 사람을 태운 비행, 브랜디, 위스키, 장기, 증기기관의 기본 구조, 배의 키, 등자(鐙子) 등도 모두 중국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그림으로 보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 – Joseph Needham –
이언 모리스 교수는
11세기 동양의 송나라에서 많은 발명품을 만들고 서양 르네상스와 같았던 그 분위기, 15세기 명나라의 진보하던 사회를, 무너뜨린 것은 북방 이민족의 변수였다고 한다. 중국은 사방으로 정말 탁 트여있다는 걸 우린 알고 있다. 사방과 바다 어디로도 막힌곳이 없다.
우리 동양이 창의성이 부족하다거나, 성리학 유교 탈레반 덕분에 망했다..
이런 설명들은 완벽하지 않고 패배주의적인 마인드이면서
오히려 반대였던 부분이 많다는 거다.
2. 유럽이 대항해시대를 연 배경, 진행과정, 결과적 이점들
간단하게 대항해시대 이전을 보자.
13세기의 유라시아 무역망이다. 지금의 세계를 ‘팍스 아메리카’라고 부른다면,
저 당시의 세계는 ‘팍스 몽골리카’로 불렸다. 팍스 몽골리카 시대에 쓰여졌던 책이 바로 그 유명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다.
그런데 역사상 모든 제국의 운명이 그러했듯이
몽골 제국이 정치적으로 분열하고, 또 흑사병이 중국부터 유럽까지 전부 전파되게 된다.
그렇게 팍스 몽골리카 아래의 13세기 유라시아 무역망도 끝장나는 지경에 이른다.
당시 흑사병이란 정말 끔찍한 것이였다. 그 기록도 이렇게 나온다.
[1349년 1월 이집트 카이로]
새 증상이 나타났고 사람들은 피를 내뱉기 시작했다. 한 환자는 체열이 높아지고,
참을 수 없는 구토 증세를 보이더니, 피를 뿜고서 죽었다.
환자의 집에서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도 하나씩 병에 걸렸고, 하루 이틀 밤 사이에 모두 숨졌다.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약화되었고, 아무런 해결책도 없어 보였다.
왕실 호위대는 거의 사라졌으며 술탄이 거주하는 성채의 막사에는 병사가 남아 있지 않았다.
시신 운구자는 6디르함을 선불로 요구하였는데, 그나마도 이런 시신운구자를 구하기 어려웠다.
무덤 파는 일을 하는 사람은 한 무덤에 50디르함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대부분 자신이 번 돈을 미처 써보기도 전에 죽어 갔다.
한편으로는 흑사병으로 인해 살아남은 사람들의 실질 임금이 상승하는 보너스를 얻을 수 있었다.
여기서 맬서스의 설명을 들어보자.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인구가 늘어나면 결국 자원이 부족해진다. 인구가 줄어야 실질 임금이 늘어난다.
그럼 흑사병으로 수천만명이 떼죽음 당했는데 실질임금 올랐냐?
아래의 그래프는 1860년대 1인당 소득을 100으로 둔 그래프다. 보면 흑사병이 발발한 이후 떼죽음을 당한 1450년대 영국의 실질임금을 보면 이미 산업혁명을 시작하고 충분한 시간이 흐른 뒤인 1860년대 영국 실질임금의 80% 정도에 이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는 인류가 맬서스 트랩으로부터 탈출하기 전의 상황이였으며, 맬서스의 설명은 상당히 유효했다.
당시의 세계는 지금과 같이 기술의 발전에 따른 생산성의 향상을 향유할 수 없었던 세계였다.
그래서 인구가 늘면 쓸 수 있는 자원이 한정되어 있으니 마치 배양액 속의 세균들처럼
한정된 자원 덕분에 ‘일정 숫자 이상으로 번식하면 줄어들고 다시 번식해서 늘어나고’를 반복하던 세계였다.
그래프가 보여주는 것처럼 마치 우리나라 코스피 지수가 항상 2000포인트대에서 머물듯 절대 저 박스권을 탈출하지 못하는 걸 볼 수 있다.
출산율 상승 -> 부존자원 하락 -> 기아, 전염병 등 -> 인구 감소 -> 부존자원 상승 -> 출산율 상승 ->
위와 같은 현상을 바로 맬서스 트랩이라고 부른다.
흑사병은 13세기 팍스 몽골리카 아래에 진행되던 무역망의 쇠퇴를 가져왔지만 유럽에서는 그 덕분에 실질임금이 상당히 증가했고 다시금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 당시에 유럽이 다시 경제를 일으키고 동방 지역과 무역을 하려면 매우 비싼 댓가를 치뤄야만 했다.
이슬람 세력(오스만 제국)이 동과 서를 연결하는 다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유럽과 동방 지역을 이어주는 다리와 같은 존재였는데 베네치아에 매우 비싼 가격에 향신료같은 동쪽의 물건을 팔아 넘겼고 베네치아는 또 서유럽에 더 비싸게 팔아먹는 교역망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비잔틴 제국까지 이슬람에게 함락되면서 유럽인들은 더더욱 비싼 값을 치루고 교역을 해야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교황 : 이교도 새끼들이랑 교역안함 ㅗㅗ
오스만 : ㅗ
이전에 쓴글을 보면 알겠지만 베네치아는 땅이 척박하고 늪지대여서 생산품이 없었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는 무역을 해야 했다.
자존심이 문제가 아니라 생사가 걸린 문제 였기 때문에 무역을 시도하는데
마호메트 2세
뜻밖에도 베네치아 사람들은 교역을 재개하는데 성공하는데
당시 마호메트 2세는 그래도 유럽인들의 종교에 관대해서 그렇다 카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덕분에 베네치아는 무역으로 꿀빨고 있을때 다른 유럽국가들은 불만이 많았다.
특히 스페인과 포르투갈이다.
항해왕 엔리케:
“저 오스만 놈들을 통해 무역하지 말고 향신료를 운반할 다른 길을 찾아보자.
전설에 의하면 오스만 제국 너머 동방에 기독교 왕국을 건설한 인물이 있다는데 말이지.
그 사람들과 접촉해서 힘을 합치면 저 오만하기 짝이 없는 오스만 제국 놈들을 무너뜨릴 수도 있잖아?“
그래서 미개척항로였던 바다로 나갔다.
바스쿠 다 가마는 아프리카 남단을 통해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게 된다.
그리고 포르투갈은 향신료 무역을 시작하게 된다.
그 과정에는 폭력과 식민지화가 있었다.
결국 대항해시대를 열어 가면서 포르투갈이 향신료를 유럽으로 가져오고 베네치아는 그동안 막대한 이득을 얻게 해줬던 ‘지리적 이점’이라는 측면에서 서서히 쇠퇴하는 길을 밟게 된다.
영국의 경우도 포르투갈과 마찬가지로 폭력을 쓴다.
면직물 수입 때문에 금과 은이 고갈나면 면직물 공급자를 빵야빵야 쏘면 된….;;;??
나중에 영국의 산업혁명과 식민지화에 대해서 다뤄 보겠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주의 미덕이라는 말은 비꼬는거다.
그리고 콜럼버스가, 죽을 때까지 아시아라고 믿었던,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모두가 잘 아는 삼각무역이 형성된다.
당시 카리브해는 조건이 너무 좋았는데 유럽인들 입장에서 단 하나 부족한 게 있었다.
바로 ‘노동력’이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끌어다 카리브해에서 쓰게 된 것이다. 원래 중남미 지역도 북미보다는 인구밀도가 높아서 원주민이 많긴 했지만, 유럽 사람들이 원주민들이 죽을 때까지 노동력을 쥐어짜다보니 결국 노동력이 부족해지는 상황도 발생했고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가져오게 된다.
당시 삼권분립으로 지금 유명한 몽테스키외는
“노예들을 인간이라고 여긴다면, 우리는 기독교인이 아닐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시대 상황이 어떤지 느껴질 것이다.
세계는 이렇게 연결된다. 이전의 13세기 유라시아 교역망보다 훨씬 넓어졌다.
그리고 신대륙으로부터 금과 은을 가져온 스페인은 금과 은을 이용해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며 잠시 부자 나라가 되는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대항해시대 초기 이후 스페인은 주도권을 영국에게 내주게 된다.
왜 그렇게 됐을까?
이건 국가의 부를 보는 측면의 문제로 볼 수도 있다.
국가의 부는 무엇으로 나타낼 수 있을까?
금과 은의 보유량? 경상수지 흑자 규모?
그렇게 본다면, 중상주의(mercantilism)을 주장하는 사람이다.
애덤스미스는 국가의 부는 국민들이 쓰는 생필품의 총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금과 은을 통해 부자가 됐지만 스페인은 결국 장기적으로 그것이 산업 발달을 저해하게 됬다.
영국의 소득 수준은 길고 긴 산업혁명 이후로 쭉쭉 상승한다.
산업혁명이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왜 불가능 했는지에 대해 설명을 한다면..
보통은 ‘재산권 확립’, ‘계급 투쟁’, ‘제도적 요인’ 등을 말할 수가 있다.
그런데 다른 설명 요인을 강조하는 학자들이 있다.
위에 인터뷰에 나온 케네스 포메란츠, 시카고대 교수
원래 동아시아, 유럽 상관없이 공업의 생산력이 향상되면 결국 농산물 상대적 가격이 상승했다.
부존 자원의 한계 때문에 공업의 생산력이 향상되도 결국 주변의 환경 파괴와 자원 고갈 문제로 인해
더 고도화된 산업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자꾸만 좌절을 겪어야 했다.
그래서 도시의 붕괴로 이어지고, 산업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어야 하는 ‘도시화’가 유지되지 못했다.
노동자들은 다시 농촌으로 향해버렸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들과 달리 영국은 아주 아주 운이 좋게도,
석탄이 매우 풍부했고 또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맨체스터의 사례처럼 말이다.
또한 신대륙의 발견으로 노예들을 이용해서 얻은 생산물들로 많은 인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산업화 과정에서는 농산물의 가격이 안정적이여야 노동자들이 저임금에도 일을 지속할 수 있잖아?
위의 내용들은 전부 왜 서양이 지금까지 세계를 지배했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그래서 지금의 세계 경제가 왜 부국과 빈국으로 나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설명 방식이 훨씬 유효하다.
바로 ‘제도적 차이’라는 설명 방법이다.
왜 제도적 차이로 현재를 설명하는 게 유효한지는
아래와 같은 국가들을 서로 비교해보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된다.
1. 북한과 남한
2. 홍콩과 중국
3. 대만과 중국
4. 미국과 멕시코
그러니까 종속 이론같은 허접한 거 빨면 그냥 계속 빈국으로 사는 수밖에 없다.
그런점에서
나는 애덤 스미스의 통찰력에 약간 감탄한다.
애덤스미스는 미국이 독립한 그 해에 국부론을 써냈고
대항해 시대에 대해 낙관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아메리카의 발견과 희망봉을 경유하는 동인도 항로의 발견은
인류 역사에 기록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다.
그것들의 성과는 이미 너무나 거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발견 이래 아직 2-3세기밖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것들의 성과의 모든 크기가 나타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인간의 지혜도 장차 이 위대한 사건들로부터 인류에게 어떤 이익이나 불행이 생길지를 예견할 수 없다.
세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들을 어느 정도 결합시키고, 서로의 부족분을 경감시킬 수 있게 하며,
서로의 즐거움을 증대시킬 수 있게 하고, 서로의 산업을 복돋우게 함으로써 그 발견들의 일반적 경향은 이로운 것 같다.
그러나 동서 인도의 원주민들에게는, 그 발견들로부터 생길 수 있었던 모든 상업적 이익들이 무서운 불행 속에서 상실되었다.
그렇지만 이런 불행은 그 발견들 자체의 속성에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발생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생긴 것처럼 보인다.
이런 발견들이 이루어졌던 특정 시점에서
우연히 유럽 사람 쪽의 힘이 월등하여 멀리 떨어진 나라들에서 온갖 불의를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그 나라들의 주민이 더 강하게 되거나 유럽 주민들이 더 약하게 되어,
세계 모든 지역의 주민들이 용기와 힘의 균등 상태에 도달해서 상호의 공포심을 고무시킴으로써
독립국들이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서로서로의 권리를 존경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힘의 균등을 확립하는 방법으로서는, (나라들 사이의 광범위한 교역이 자연히 또는 필연적으로 가져오게 될)
지식과 각종 개량들의 상호 교류가 가장 확실한 방법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