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간도독립군의 자유시와 마자노프 이동
간도독립군이 1919년부터 악명 높은 게 있는데 러시아 지역내 약탈이었다.
“무기와 식량,피복 등을 자체 조달해야하는 빨치산부대들로서는 그것들을 한인 마을들에서 조달 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연해주 자체에서 생성된 빨치산부대가 아닌 간도로부터 이동해 온 독립군부대는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때로 이들은 현지의 한인들에게 폭도로 인식되기도 했으며,실제로 약탈행를 자행한 경우도 많이 있었다”1
악명높은 간도 독립군부대의 예가 최영호의 부대였다.
최영호는 만주에서 연해주로 이동하다가 살해당했고 그에 대해 최영호의 부하들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그러던 중 하루는 자리꼬보촌 부근에 위치한 한인마을 만석동에서 부농들이 그룹을 짜서 최근 남만주에서 온 빨치산부대장 최영호 동무를 죽였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최영호는 남길림지역에서 현지 청년들을 모아부대를 편성한 사람으로 한일합방 전에 왕실 경호원으로 있었다.( 중략 -필자)고 최호의 부하들 이야기에 따르면 만주에서 활약한 그의 유격대는 일본토벌군대와 싸우다가, 독립운동의 전개력에 질겁한 일제가 이곳에 대대적인 토벌병력을 투입하자 향후 전투를 위해 유격대원을 아끼려고 연해주 그로데꼬보로 거점을 옮기게 됐다. 오랜 행군에 대원들은 지칠대
로 지쳤고, 최영호대장은 휴식을 해 을 찾아다니다가 자리꼬보에 도착한 것이다. 이때 부농그룹의 불의의 공격을 받은 유격부대는 포로가 되었다.반란자들은 최영호부대장을 잔혹하게 죽였다고 부하들은 말했다. 유격대 야전 군법회의가 소집되었다.군법회의는 부농 5명에게 사형을 언도했고 게릴라부대장 살해에 직 참여하지 않은 자 3명에게는 거액의 벌금을 내게 하고 그들을 만석동에서 추방한다는 선고를 내렸다』2
그런데 최영호는 왜 죽은걸까? 이에 대해 일본군 문서와 공산당 증언에서 일치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그건 약탈과 살인 때문이다.
사건 당시 일본군 문서:
「그로데꼬프(선인은 고로지게라고 칭함)방면을 배회하며 양민을 괴롭히고 있던 폭도 수령 崔永浩는 1월 하순 러시아관헌에게 총살되었다. 그 원인에 대해 밀정의 말에 따르면 최영호는 종래 양민으로부터 군자금이라고 칭하며 모집한 금전을 그 부하 수십명( 약 10 0명이라고 함) 과 함께 徒食했던 바 행상인 또는 여객을 잡고서 日探이라고 칭하며 부하를 시켜 그를 살해하고 소지금을 약탈하는 일이 많았는데,최근 추풍으로부터 同지방으로 들어온 한 상인을 日探이라고 칭하며 살해하고 그 사체를 崔자신이 숙박하던 집의 주인 金永洙에게 명하여 은히 매장했는데,뒤에 김영수의 입을 통해 사실이 발각될 것이 두려워 부하에게 명하여 김영수를 살해했다.그런데 김영수의 아들이 이 사실을 알고 곧바로 러시아관헌에게 알려 러시아헌은 곧바로 김영수의 집을 에워싸고 총탄을 퍼부었던 바 최영호와 그 부하 2명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다른 2명은 체포되어총살당했다」3
공산주의자 빨치산의 증언:
「조맹선은 만주에 있을 때 자신의 부대를 무장시키기 해 최영호를 우두머리로 하는 빨치산 약 200명을 호르바트 부대에 의용군으로 파견하여 무장을 받은 후 탈영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무기를 가지고 탈영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1919년 가을 최영호를 우두머리로 한 비무장 탈영병 약 100명은 그로데꼬보에 도착하여 “ 독립단”부대로 불리게 되었다.이 부대는 약탈행를 일삼고 평화로운 주민들을 살해했다.결국 주민들은 “ 독립단” 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켜서 몇 명을 죽는데,그 속에는 최영호도 들어있었다. 」4
그 외 “일본군의 정보문서에는 연해주 현지 주민에 대한 약탈행위에 대한 보고가 끊임없이 보이고 있다.이 모든 것을 약탈행위라고 치부할 수는 없지만,그 주체가 부분 간도에서 넘어온 독립군부대라는 점에서 그들의 어려움을 추측해볼 수 있다.”5(그리고 한국독립군의 약탈은 아래 러시아 문서에서도 잘 나온다.)
그런데 나중에 간도독립군들은 대규모로 러시아로 이동해왔다. 그 이유는 일본군의 만주침공 때문이다. 일본군의 침공과 학살 탓에 간도에서는 투쟁이 불가능해졌기에 독립군부대들은 러시아지역으로 퇴각했다. 6
다시 말해 일본군의 학살로 위협을 받고 주둔지로 잃었기에 러시아로 간 것이다.
『1920년대 초 대규모의 항일독립군이 밀산을 거쳐 러시아로 넘어갔다. 가장 큰 이유는 일제의 초토화 공격에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청산리 전투 이후 일제는 토벌공세를 높여 경신참변과 같은 만행으로 독립군 근거지를 초토화시켰다. 독립군 입장에서도 일련의 대전투에서 무기, 탄약을 소진하여 현존 무력을 보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7
이 과정에서 김좌진과 홍범도는 해산했던 독립군인들을 다시 집결할 것을 고했다.
『해산한 아군사에게 고한다.
지난번 아대병을 해산한 것은 일시의 변법에 지나지 않고 광복사업 성취하지 않는 한 그를 해하려서는 안된다. 이제야 노농정부와 약정하여 군수 충분하고 또 무기탄약은 제한없이 무료로 공급받을 것이다. 이래 와신상담 산야에 전전한 목우즐풍 영일 없이 상하 서로 피를 철하고 맹약한 바를 지켜야 할 것이다.』
– 김좌진·홍범도
8
당시 대한민국(대한민국 임시정부)정부와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는 무언가 합의를 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독립군들이 자유시로 몰려오는 상황이었다. (그것의 실체가 ‘대일한로공수동맹’인지는 불분명)
9
간도독립군들이 러시아로 넘어간 건 간도독립군들 본인들이 위험했기 때문이다. 현지군인들이 불러온 게 아니다.
(극동공화국)
현지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은 몰려오는 한국독립군에게 ‘무장해제’하라고 단호하게 요구하였다.
이 때 이들은 독립군을 “정치적 이민자”로 규정했다.
『하바롭스크 시
1921년 1월 3일
1
남쪽에서부터 중립지대를 거쳐 왔거나 중국 영토로부터 왔거나 제2아무르군 관할지역에 온 모든 한인부대를 즉각 무장해제할 것을 명령한다. 이경우 무력이라는 가장 단호한 수단 도 동원 가능하다. 무장해제는 완벽히 이루어져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총포류나 도검류를 하나라도 남기지 않는다.
2
한인 무장부대를 무장해제한 후에 구역 책임자들은 한인들이 자유시민의 완전한 권리를 향유하는 정치적 이민자로서 갖는 일반 권리에 의거해 스스로 자신의 거주 장소로 선택한 먼 후방으로 이동시키기 위한 차량이나 마차들을 즉각 요청한다.
3
무장해제를 실행하는 책임자들은 즉각 모든 무기를 목록화 하여 각 사단이나 제2군의 포병보급 부서로 보낸다.
제2군 사령관 쇼리쉐프
정치위원 멜니코프
군참모장 임시 직무대리 뷔로프
원본 확인: 작전관리국장』
10
그런데 일부 한국독립군들은 무슨수를 써서라도 무기를 갖고 넘어가려고 했다.
다시말해 일부 독립군은 자신들이 위기라서 타민족의 영토에 이동하는 처지이면서 현지 지휘관의 무기 양도 요구를 거부하고 들어가려고 했다.
독립군이 현지지휘관의 요구를 거부하며 러시아에 접근하자 제2군사령관은 단호하게 막으려고 하였다.
그리고 한국 독립군에 대한 조치를 중국마적(홍후즈)에 대한 조치와 동일하게 취급했다 . 중국마적(홍후즈)과 마찬가지로 한국독립군도 절대 현지로 넘어오지 못 하도록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막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현지 영토로 이주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있을 경우에는 통행 허가에 각별히 조심해야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미 현재지역에 들어온 독립군에게는 제발 떠나라고 요구하였다.
『하바롭스크 시
1921년 3월 9일
1
한인부대들이 무기 양도를 거부할 경우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그들을 즉각 무장해제하라는 금년 1월 3일자 제2아무르군 각 부대에 대한 명령18호를 반드시 집행할 것을 확인한다. 만약 한인부대들이 무기 양도를 단호히 거부한다면 군사활동을 개시하여 길을 차단하여 그들이 우리 쪽으로 넘어오는 것을 용인하지 말라. 반대의 경우, 그들에게 우리 군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떠나라고 제안하라.
2
아무르 국경지대에 출현한 무장 홍후즈 부대들이 우리 쪽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무력 동원을 포함한 가장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 한인 부대들에게 대해서도 그 지도부에 동일한 조치를 취하라. 우리 영토로 이주하고 싶다는 그들의 간절한 바람이 있을 경우, 범죄분자들이 유입되지 않도록 통행 허가에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각 경우에 관해 군사령부에 즉각 알려야 한다.
제2군사령관 파블로프
군정치위원 멜니코프
군참모장 쉬콜린
원본 확인: 작전관리국장』
11
현지의 극동공화국 군지휘관들은 무장한 독립군들이 오는 걸 전혀 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단호하게 거부하려 하였다.
김좌진·서일·이범석·나중소 부대는 다시 만주로 되돌아갔다. 되돌아가지 않은 군인들은 자유시로 이동했고 그 이후 양도했던 무기들을 되돌려받았다. 12
자유시로 이동해온 간도 독립군들은 이전 재러 한인독립군과 함께 대한의용군으로 들어갔다. 대한의용군은 1921년 3월까지 대한민국 정부를 봉대했던 부대였다. 13 (참고로 대한의용군=특립사할린빨치산부대 이다.)14
이후 대부분의 독립군들은 마자노프란 마을에 집결하였다. 15
그런데 당시 독립군 각 부대들은 “자기들의 장교에게 스스로 그 지휘를 원하고 다른 군대의 장교는 일면도 없는 까닭에 지휘를 받는 일을 원하지 않”았다. 16 그러니깐 독립군들은 타민족의 영토에 들어와놓고 자기들의 장교에게만 지휘를 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2. 마자노프의 폭동과 약탈
극동공화국 전군 총사령관이 극동공화국 정부 수반 크라스노쇼코프에게 보낸 보고에 근거하면 마자노프에 집결한 한인부대의 지휘간부들은 분명 “한국에서 활동하던 시절의 부대장 출신들”이며 “모두 무장하였”고 “자신의 무기를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다.
다음은 극동공화국 전군 총사령관이 정부 수반 크라스노쇼코프에게 보낸 보고서이다.
『극동공화국 전군 총사령관.
1921년 5월 21일. 제566호.
극동공화국 정부 수반 크라스노쇼코프 동무 귀하.
빨치산 한인부대들에 관한 보고.
빨치산 한인 그룹들은 극동공화국 영토에서 생겨났는데 그것은 한국의 민족운동이 일본인들에 의해 진압된 후 한국 국경을 넘어 여기로 순조롭게 스며든 빨치산 부대들이 집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상기 부대들의 주창은 한 편으론 코민테른에 있으며, 다른 편으로는 이 분산된 부대들을 모이도록 하고 보존해서 그들을 한국 인민의 권기를 위한 일본과의 투쟁에 다시 대비하게 하도록 결정된 데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스바노드니 시 부근(알렉세옙스크)의 크라스노야로보 및 마자노브 읍에 지금 1500명에 달하는 다양한 한인빨치산 부대들이 집결해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무장하였습니다.(자신의 무기를 그대로 보유하고 있습니다.) 지휘간부들은 예전 한국에서 활동하던 시절의 부대장 출신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일본군 및 중국군에서 복무한 한인장교들이 있는데, 코민테른 극동비서국에 의해 임명된 지도부를 인정하지 않고 복종하지 않으려는 집요한 경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7
한국독립군들은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려하였다. 그런데 현지 러시아 농민들은 그걸 원하지 않았다. 러시아 농민들에겐 한국독립군을 위해 식량을 바쳐야할 의무나 책임이 당연히 없었다. 그러자 독립군들은 현지 러시아농민들의 식량을 강제로 뜯어가며 폭력을 일삼았다.
현지 러시아 농민들은 한국 독립군에게 분노를 느꼈다. 분위기는 점점 심각해졌고 한국독립군과 현지 러시아 농민 사이의 전면적 무장충돌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 되었다.
총사령관 에이헤는 4월 23일부터 이미 “농민과 한인들 간의 전면적 충돌이 발생할 수 있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치타.
1921년 4월 23일 20시
전보
이르쿠츠크.
제5군 혁명군사호의 위원 슈먀츠키 귀하.
치타에서 귀하와 함께 한인사할린빨치산부대에 관해 대화한 적이 있는데, 그 부대는 자신의 활동으로 지역 농민들을 자신의 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농민과 한인들 간의 전면적 충돌이 발생할 수 있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습니다. 이 현상의 주된 원인은 부대의 어려운 식량 사정이며, 그것을 제거하기란 전박적 식량위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적합한 부대장의 부재 또한 그 원인입니다. 상황 악화를 피하기 위해 부대는 다른 인접지역으로 이전될 것입니다. 상황의 정리 및 예정대로 신속한 부대 이전을 위해 칼란다리쉬빌리 동무의 조속한 출발을 요청합니다.
제369호
총사령관 에이헤』
18
현지 농민들이 한국독립군을 거부한다는 건 대한의용군 자신의 보고서에도 나와있다.
『특별사할린빨치산부대 본부.
1921년 5월 7일
제2군 사령관 및 정치위원 귀하.
(……)현 시점에 부대가 식량문제로 위기상황이 있고 그 때문에 농민들과의 갈등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갈등은 수습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는 비록 3일간이라도 부대를 방치할 수 없습니다. 식량은 스보보드니 식량기지에도 배급지점에도 없습니다. 스바보드니 식량기지에서 수령한 200푸드의 밀가루는 스바보드니 시의 보급창에 쌓여있는데, 운송수단도 없고 농민의 완강한 협조거부 때문에 각 부대로 배급할 수 없습니다. (……)』
19
다음은 당집회 위원들이 총사령관에게 보낸 청원이다.
『당집회 위원들의 총사령관에의 청원
1921년 5월 13일
총사령관 귀하
부탁이 있습니다. 즉각 [판독불가] 특별사할린빨치산부대에 3000명이 있는데 3개월간 주둔하고 있습니다. 면 주민들은 가난하며, 이들이 새로 정주한 병사 3000명을 부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향후 그들이 계속 주둔한다면 들판에 뿌릴 종자마저 없어질 것입니다. 부대는 탄압적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체포와 폭력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악화된 관계는 무장충돌의 일보직전에 있습니다. 귀하의 결정을 촉구합니다.
당집회 위원 안친페로프, 데예야토프, 프로야예프』
20
다음은 정치특사가 보낸 보고서이다.
『아무르주 정치특사 야코블레프
블라고베센스크 제01928호
1921년 5월 14일
전보
치타. 총사령관 귀하.
창립회의 아무르 위원들이 마자노보에서 타전합니다. 마자노보 지역에서 숙영하고 있는 한인부대가 주민들에 대해 탄압적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농민들에 대해 근거 없는 체포 및 폭력을 자행하고 지역에 전시상태를 선포하였으며, 저녁 10시 이후 통행을 금지하여 그럼으로써 현재 아주 늦게 끝나는 농민들의 작업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귀하의 지시를 어기고 한인부대는 주민들에게서 계속 식량을 조달하고 있습니다. 창립회의 위원들은 부대의 즉각적 퇴거를 요청합니다. 왜냐하면 주민들과 대립이 극단적 한계에 도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관해 알리면서 한인부대의 즉각적 퇴거를 위한 실제적이고 단호한 조치를 취해주실 것을 간절히 청원합니다. 본인에게 타전하시기 바랍니다. 제178호.
아무르주 정치특사 야코블레프.』
21
다음은 제2군 사령관 파블로프가 한국독립군과 지역주민 사이의 관계를 보고한 보고서이다.
『독립사할린빨치산부대가 배치된 곳의 지역주민들은 부대에 대해 비우호적인 태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부대 철수를 청원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성격 및 내부적 성격의 문제가 악화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한인부대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요청합니다. 다른 지역으로의 부대 이동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문제가 악화되면 농민과 한인부대 간의 전면적 투쟁으로 번질 수 있습니다. 제 652호
제2군 사령관 파블로프
정치위원 멜니코프
참모장 쉬코미
암호해독: [판독불가]』
22
총사령관은 제2군 사령관에게 한국독립군이 일반주민에게 저지르는 행위에 대해 책임지고 해결하라고 명령했다.
『치타. 1921년 5월 14일.
제2군 사령관 귀하.
사본은 제12여단 정치위원에게.
특별사할린부대 한인 빨치산들이 일반 주민들에 자행하는 난동과 강압에 대한 불평등이 또다시 본인에게 들어오고 있습니다. 빨치산들은 생존을 위한 정상적 조건 보장이라는 뜻에서 주민들이 그들에게 나타내는 무관심한 태도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한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귀하에게 직접 이 일에 대한 감독 책임을 부과합니다. 동시에 혁명 질서의 유지와 감독을 위해 부대에 대리인을 파견하십시오. 귀하의 조치들로 인해 본인이 부대에 대한 불평을 듣는 일로부터 벗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총사령관 A. 라핀』
23
극동공화국의 지도자인 크라스노쇼코프(크라스노쉐코프, 끄라스노쇼꼬프)는 한국독립군과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의 러시아인 지도자 양쪽 다에게 분노를 느꼈다.
크라스노쇼코프는 외무인민위원 치체린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문을 보냈고 전문의 사본을 레닌한테도 전했다.
『일본과의 전쟁 회피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므로, 한인들을 둘러싼 슈마츠키의 기도에 대해 나는 근본적으로 반대한다. 그 기도는 일본인들을 매우 크게 충동질할 것이다. 게다가 그는 극동 전체에서 나이가 들어 정신이 흐린 것으로 유명한 칼란다라슈빌리를 ‘조선출병’의 대장으로 삼았고, 또 칼란다라슈빌리는 한인들을 지휘하겠다고 마치 나폴레옹처럼 떠들썩하게 극동공화국 전체를 횡당했다. 매우 실망스러운 사실들은 1)4천명의 한인들이 바로 일본인의 눈앞인 블라고베센스크에 집결, 그들은 추태를 보이고 있으며, 약탈하고 주민들에게 폭행을 일삼으며 자신들 사이에서 선출된 지휘부의 명령만 듣는다. 2)이르쿠츠크의 한인연대는 블라고베센스크로 이동했으며 이로써 일본인들에게 문제를 안겼다. 3)늙은이가 조선출병을 위해 한인들을 거느리고 2000 베르스타에 달하는 중국 영토를 횡당하겠다는 구상은, 완곡하게 말해서, 시인의 머릿속에서나 생길 수 있는 발상이지만, 안탄타(제1 세계대전 시 대독연합)의 눈에도 정당해 보일 수 있는 일본의 공격을 초래할 수 있다.
-「극동공화국 대표부의 크라스노쉐코프의 외무인민위원인 치체린에게 보내는 전문」(사본은 레닌에게, 옴스크, 1921년 6월 3일), 러시아 국립사회정치사 문서보관소, 서고 17, 목록 84, 사건 191, 장 10~11』
24
(크라스노쇼코프)
당연하지만 당시 지역은 한국독립군과 러시아인 공산당뿐만 아니라 러시아극동 농민들도 있었다. 독립운동가와 공산당 사이의 문제가 아니다.
3. 주석
1.
고려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윤상원, 2010,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112쪽
2.
박청림의 회고,
윤상원, 2010, 111쪽에서 재인용
3.
「 機密 第1 1 號,鮮人ノ行動二關スル件」 ,1 9 2 0 .2 .1 4 , 在西比利亞部 9 권,15 항,
윤상원, 2010, 110쪽에서 재인용
4.
ЦойХорим,Там же( 최호림,「 내전 시기 극동주에서 한인빨치산운동」 ) , с. 158
윤상원, 2010, 111쪽에서 재인용
5.
윤상원, 2010, 112쪽
6.
윤상원, 2010, 167쪽
7.
백기인·심헌용 집필, 김용달·한시준·박환·장세윤·황민호 감수, 2017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94~95
8.
백기인·심헌용 집필, 2017, 78~79쪽
9.
윤상원, 2010, 153~154쪽
백기인·심헌용 집필, 2017, 78·95쪽
반병률, 2013, 『홍범도(1868-1943)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재해석』, 국제한국사학회 1호, 92~93
10.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52~53
11.
이완종, 2014, 54~55
12.
윤상원, 2010, 170~171
백기인·심헌용, 2017, 95~96쪽
13.
자유시엔 1921년 1~3월에 도착해 온 연해주 출신 한인 빨치산 부대인 이만군대·다반군대·니항군대·자유대대·독립단 군대 등과 북간도 밀산을 거쳐 온 최진동·안무군대 등의 독립군부대 그리고 뒤늦게 합류한 홍범도·이청천 부대들이 집결한 상황인데 이 중 니항부대가 극동화국의 지원을 받아 대한의용군 총사령부를 결성하였다. 이중 오하묵이 주도한 자유대대는 니항부대와 대한의용군을 거부했다.
백기인·심헌용, 2017, 96~98)
14.
윤상원, 2010, 178
윤상원, 2017,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 한국사연구 (178) , 243 쪽
임경석, 2009,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42권 초기 사회주의운동』,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72
15.
윤상원, 2010, 180
윤상원, 2017, 245
임경석, 2009, 173~174
16.
윤상원, 2010, 175~176
17.
이완종, 2014, 205~206
18.
이완종, 2014, 177쪽
19.
이완종, 2014, 93
20.
이완종, 2014, 199
21.
이완종, 2014, 198
22.
이완종, 2014, 166
23.
이완종, 2014, 195
24.
보리스 박·니콜라이 부가이 지음, 오성환 감수, 김광환, 이백용 옮김, 2004, 『러시아에서의 140년간 -재러한인 이주사-』, 도서출판 시대정신, 206·219쪽
4. 사진출처
https://ru.wikipedia.org/wiki/Дальневосточная_республика
https://ru.wikipedia.org/wiki/Краснощёков,_Александр_Михайлович
5. 기타: 자유시 참변 직후 니콜라옙스크 학살에 대한 언급
사실 독립군 측이 벌인 테러중에 이것과 비교가 안 되는 엄청난 사건이 있다. 그게 트랴피친과 활동한 니콜라옙스크 학살사건이다.
자세한 건 나중에 쓰고 관련된 부분 중 일부만 옮겨본다. (영어부분에 대한 요약있음)
『The executions were carried out by special units consistingof Russian, Korean, and Chinese partisans loyal to Triapitsyn. Eachnight they went to a prison and, following the list, killed a setnumber of victims (30 to 40). At that time about 1,500 prisoners wereheld in the places of detention in Nikolaevsk.』
Anatoly Yakovlevich Gutman 지음, Ella Lury Wiswell 번역 겸 서문, Richard A. Pierce 편집, 1993, 『The destruction of Nikolaevsk-on-Amur : an episode in the Russian Civil War in the Far East, 1920』, Alaska Limestone Press, 102쪽
『After occupying the town, the Bolsheviks set out to attract the Koreans to their side. They contacted a Korean teacher, Pak, who, taking advantage of his influence among the Koreans, persuaded them to participate in the activities of the Bolsheviks who promised in exchange to help liberate Korea from the Japanese.
Korean youths, infected by nationalist slogans, res-ponded to the inflammatory speeches of Pak, who promised that Soviet Russia would help to liberate the Korean people from the yoke of Japanese oppression. As a result, a Korean Society was organized, whose aim was to free Korea and to spread the ideas of bolshevism throughout the Korean population. The Society entered into negotiations with Red Army Headquarters and signed a formal treaty, which permitted the Korean Society to organize military detachments and acquire arms. These detachments were to be sent eventually to Korea. Until then they were to take part in Triapitsyn’s struggle against the opponents of the Bolsheviks and be at the disposal of the Red Army Headquarters as a separate Korean detachment. Red Army assistance would not cease until such time as Korea became an independent state.
The treaty was signed by Triapitsyn, Nina Lebedeva Kiashko, and Sluchainyi for the Red Army Headquarters and by the head of the Korean Society.
As soon as the treaty was concluded, the newly formed Korean detachment began signing up volunteers. Three hundred joined during the very first week. The Korean detachment, along with the Chinese, represented the main force with which Triapitsyn and the people surrounding him were able to dominate Nikolaevek, boldly and without fear. The partisans recruited from among the peasants were a less stable element, because they were always ready to crossover to the side which was strongest at any given moment, a situation that made it necessary for Triapitsyn to consider their moods and wishes.
At Triapitsyn’s command, the Korean and Chinese detachments could always suppress discontent among the partisans. This is exactly what happened around 20 April. The Korean detachment was considered to be the most reliable military unit of the Red Army. Discipline was very strict.
After 1 May, the guards at the prison and the guardhouse were recruited from the Korean and Chinese detachments, because Triapitsyn had become suspicious of the loyalty of Russian partisans.』
Anatoly Yakovlevich Gutman ,1993, 123
『Responsible posts were also filled by Koreans, and, to be fair, they carried out their guard duties excellently. They did not permit any indulgences to the prisoners. Contrary to the practice of the peasant partisans, they never left their posts and were always sober when on duty.
The attitude of the Koreans toward performing the duties which they took upon themselves is explained by the fact that the detachments consisted exclusively of young Koreans, who loved their motherland and sincerely believed that only the Bolsheviks could help them and that only with that help could Korea obtain its freedom.
Korean partisans did not take part in requisitioning, confiscating, plundering, or coercing. They were unquestioning pawns in the hands of Triapitsyn.
During the evacuation of Nikolaevsk and the destruction of the town, the Chinese and Korean detachments were of great service to Triapitsyn. The Koreans and the Chinese were the chief executioners in carrying out the mass death sentences. From the beginning of May, Triapitsyn no longer trusted the peasant partisans and gave responsible duties only to the Koreans. They left with Triapitsyn for Kerbi, where some of them scattered into the taiga, while others went along with the Red detachments to Blagoveshchensk, where they joined the Red Army.』
Anatoly Yakovlevich Gutman ,1993, 124쪽
요약하면 명백히 한국에 대한 분명한 민족주의 성향 · 독립운동 · 한국에 대한 애국심이라는 목적성이 분명한 한국인들이 트랴피친과 활동하며 학살을 했으며 그 행위가 오히려 러시아 농민들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트랴피친도 한국인을 러시아농민보다 신뢰했다는 내용이다.
‘자유시 참변’ 직후 해당 공격을 주도한 제2군 사령관 쇼리쉐프는 보고서를 썼는데, 진압당한 인물들 중 일부가 트랴피친파라고 지칭하고 있다.
『우리 군대에는 사상적 위험분자들에 더해 이 한인 부랑배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유사한 폭동을 반복케 할 것입니다. 치타에 있을 때 본인은 무장한 한인대중 더하기 트랴피친파가 누구인지를 귀하께 알려드렸습니다. 이 폭동을 진압할 때 전사한 인민군 병사 각 1명은 한인-파충류 수천명의 가치가 있습니다.』
(이완종, 2014, 43)
분명 자유시참변 직후 주도한 제2군 사령관이 트랴피친파라는 지칭을 사용하고 있다.
제2군 사령관 쇼리쉐프
(사진출처: https://ru.wikipedia.org/wiki/Серышев,_Степан_Михайлови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