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미제사건 File] 11.수원역 가출소녀 살인사건 (2007)
혹자는 말했다.
“범인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어지는 것’ 이다.”
곧, 범인이란 붙잡혀 단서와 심문으로 혐의가 인정 되었을 때 비로소 ‘범인’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적절해 ‘보이는’ 단서와 적절해 ‘보이는’ 증거를 취합한다면
범인을 직접 ‘구성’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공권력의 ‘수사’라는 단어를 향한 맹목적인 신용에 의하여
희석되고, 곧잘 묻혀버리고 마는 것이다.
경찰은 ‘진범’을 잡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며,
그밖의 공권력 또한 이를위해 헌신적인 기여를 마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의하여.
하지만 이 사건을 바탕으로
경찰 수사에 대한 ‘불신’은 큰 틈바구니를 마련하게 되었다.
마치 묵혀왔던 소피所避가 방광을 헤집고 비져나오듯ㅡ
2007년 5월 14일. 새벽 이른시간.
경기도 수원시 매교동 수원고등학교 본관 건물 앞에서 16세의 소녀가 숨진채 발견되었다.
시체는 학교에서 발견되었던 탓에 출동한 경찰은 학교에 재적중인 학생인지 확인하였으나
재학생이 아니었고, 실제로 교복 또한 입지않은 상태였다.
또한 팔다리에는 피멍자국이 무수히 나있었다.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고, 옷과 행색이 꼬질꼬질한 것으로 미루어
경찰은 피해자를 노숙을 하던 소녀로 단정짓고 수사에 착수하였는데
이때부터 수사는 점차 꼬이기 시작했다.
<당시 사체로 발견된 소녀의 얼굴>
경찰은 인근 수원역에 상주하는 노숙자들을 중심으로 탐문수사에 착수했다.
그런데 수사를 시작한지 얼마지 않아 사건이 발생한 수원고등학교와
수원역의 노숙자들 사이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소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수원역 일대의 노숙자들을 주무르는 대장같은 사람이 있는데,
죽은 소녀가 그 대장의 돈을 훔쳐 달아나다 잡혀 구타당하다 죽자
노숙자들이 가까운 수원고등학교에 시체를 내다버렸다”
경찰은 이 소문을 접한 후 인근 노숙자들을 집중 조사했고,
얼마지않아 수원역에서 노숙생활을 하던 20대 노숙자 나모씨, 송모씨를 범인으로하여 체포했는데
이 2명은 정신지체 장애인이었다.
검찰은 심문을 통해 이끌어낸 자백을 토대로
송모씨를 상해치사 혐의의 주범으로, 나모씨를 공범으로 기소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서울 고등법원은 송모씨와 나모씨에게 각각
5년 징역과 벌금 200만원 형을 각각 선고했다.
<사체 발견당시 피해자가 입고있었던 옷가지들>
그러나 죽은 피해자의 신변을 알길이 없었던 경찰은 심사끝에
피해자의 사진과 옷가지등을 당시 사건을 함께 취재하고있던 방송팀과 함께 인터넷에 올렸고
이는 TV에도 방송이 되었다.
그러자 2007년 6월 30일. 사건 발생 50여일 만에
피해자의 유가족이 전화를 걸어왔고, 피해자가 중학교 3학년의 김모양이며
노숙자가 아닌 가출 청소년임이 드러났다.
피해자 김모양의 삼촌이었던 양씨가
옷가지들을 보며 자신이 조카에게 사준 옷임을 알아챘고,
피해자의 사진을 보고 조카라고 확신하여 그제서야 신원이 밝혀지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김모양은 두달간을 이름없는 노숙 소녀로 지내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고,
수원의 한 병원에서 부모님과 친척 두세명이 빈소를 지키는 가운데 쓸쓸히 장례식을 치뤘다.
빈곤한 처지였던 김모양의 부모는 350만원에 이르는 장례비용을 부담할 수 없었으며
때문에 빈소에는 김모양의 영정사진만 있을 뿐, 흔한 조화하나 놓여있지 않았다.
장례식 다음날인 7월 6일, 김모양의 사체는 화장되어 홀로 고요히 산기슭에 뿌려졌다.
12월, 나모씨와 송모씨의 재판 선고가 끝나고
사건은 어렵사리 마무리 되는듯 보였다.
그러나 해가지난 2008년 1월 23일.
검찰은 5명의 가출 청소년을 잡아들였고
곧 기자회견을 열어 수원역 가출소녀 살인사건의 ‘진범’을 잡았다고 발표했다.
<진범으로 체포된 가출 청소년들이 수원역에서 현장검증을 하는 모습>
검찰은 검거한 청소년들의 자백과 체포된 노숙인 송모씨의 증언ㅡ
“꼬맹이들과 같이 소녀를 때렸다”ㅡ을 근거로 5명의 가출청소년을 기소했다.
그러나 검찰과의 취조에서는 범행을 시인하던 청소년들이
막상 법정에 서서는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피고석에 나란히선 아이들은 입을모아
“검사가 자백을 의도적으로 유도했고 위협까지 했다” 라고 증언했다.
더불어 체포되었던 2명의 노숙자도 증인신분으로 법정에 출두,
“아이들도 우리도 소녀를 죽인적이 없다” 고 증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검사는 완강히 범행을 주장했고
2008년 7월 수원지방법원은 노숙청소년 5명에게 각각 징역 2~4년 형을 선고했다.
더불어 아이들을 두둔한 송모씨 또한 위증죄로 기소되었다.
“어린 피해자가 꿈을 피워보지도 못한채 차디찬 콘크리트 바닥에서 생을 마감하였음에도
피고인은 이를 반성치않고 끝까지 범행을 부인하는 점에 엄히 처벌함이 마땅하다”
그리고 노숙 청소년들의 범행에 대한 2심 공판이 열렸다.
변호사를 선임할 돈이 없었던 청소년들은 국선 변호사와 상담,
법정에서 검사에게 “죽였다” 고 자백할 것을 위협받았음을 다시 증언했다.
결정적인 증거는 경찰의 ‘심문과정 녹화영상’ 이었다.
심문 중에, 검사는 청소년들에게 자백을 하도록 유도, 위협할 뿐만아니라
그들이 모르는 사건 사실을 거듭 알려주면서 각인시키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2009년 1월. 끈질긴 법정공방 끝에 가출 청소년 이하 5명은 무죄판결을 받았으며
곧 노숙자 송모씨의 위증죄 또한 무죄로 선고되었다.
그러자 송모씨는 피해자 김모양에 대한 상해치사 혐의 또한 재심을 요청했다.
“저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요청이 기각당한 후, 송모씨의 항고끝에 대법원에서 비로소 재심이 결정되었으며
2012년 10월 25일. 재심공판에서 송모씨는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송모씨는 이미 2012년 8월에 5년의 형기를 마치고 만기출소한 상황이었으며
때문에 사건이 알려지는 과정 중의 인권침해 등으로 변호사와 함께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결국, 사건이 발생한지 6년이 경과한 지금에 이르러 모든게 원점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7명의 용의자가 체포되었고 2명의 용의자는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결과적으로 그 7명 모두 무죄를 선고 받았다.
..그리고,여전히 김모양을 죽인 진범은 나타나지 않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