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rnard Hamilton, Professor of Crusading History, University of Nottingham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1. 왕과 국가통치기관
The central government in Jerusalem was carried out by the king with the help of great officers of state, very like those employed by the French crown at the time of the First Crusade. … None of these posts was hereditary and so the appointments were an important of crown patronage. The chancellor, head of the king’s writing office and keeper of the royal archive, was always a cleric, but the other officials were laymen.
예루살렘의 중앙 정부는 제1차 십자군원정 당시 프랑스 왕실에 의해 고용된 사람들처럼 국가의 높은 관리들의 도움으로 수행되었다. … 이러한 직책들은 세습되지 않았고 그래서 그 직책들은 왕실을 후원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왕의 문관 관리이자 왕실 기록을 보관하는 사람인 재상은 항상 성직자였지만, 다른 신하들은 평신도였다.
The seneschal was the king’s alter ego, who when necessary deputised for him in the work of civil government. He was also in charge of the treasury, known as the Grant Secrete, where records were kept of the boundaries of royal fiefs, and of the revenues paid to the crown by royal officials throughout the kingdom; and he was responsible for the garrisoning and provisioning of royal duties. The constable was supreme commander of the army under the king and was responsible for keeping military records. for hiring and paying mercenary troops and for enforcing martial law during a campaign. His deputy was the marshal. The chamberlain had charge of the camera, which dealt with the expenses of the loyal household and was also responsible for arranging the performance of homage by the loyal vassals. The duties of butler seem to have been purely ceremonial. Yet although these officials had considerable powers, their offices did not develop during twelfth into large departments of state as did those of their counterparts in Angevin England and Capetian France. This was very probably because the almost constant state of war in the Frankish East made it essential for kings to delegate authority to local lords and this inhibited the growth of centralised government.
세네샬(행정관)은 왕의 분신으로, 필요할 때 민정 업무를 대행했다. 그는 또한 Grant Secrete으로 알려진 재무부를 담당했는데 거기에는 왕실의 영지 경계와 왕실의 신하들이 왕실에 바친 수입에 대한 기록들이 보관되었고, 그는 수비대와 왕실에 대한 의무에 책임이 있었다. 콘스타블(사령관)은 왕 휘하의 군대의 최고 지휘관이었으며 군 기록을 보관하는 일을 담당했다. 용병들을 고용하고 돈을 지불하였으며, 군사 작전 동안 계엄령을 집행할 책임이 있었다. 그의 대리인이 마샬(보안관)이었다. 체임벌린(집사장)의 직무는 왕실 집안의 비용을 다루는 camera를 다루고 신하들의 경의를 표하는 행동을 정돈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는데, 집사의 직무는 순전히 의례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 관리들은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사무들은 12세기 동안 앙주의 잉글랜드와 카페의 프랑스에 있는 그들의 다른 부서들처럼 국가의 큰 부서로 발전할 수 없었다. 이것은 프랑크 동부의 거의 지속적인 전쟁 상태가 국왕들이 지방 영주들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것을 필수적으로 만들었고 이것이 중앙집권적인 정부의 성장을 방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A successful king needed to work harmoniously with a relatively small group of powerful men, some forty in number, consisting of the other members of the royal family, the great officers of state, the principal crown vassals, the leaders of Catholic hierarchy, the masters of military Orders and the representatives of Italian communes. Although the High Court of Jerusalem was the theory the chief advisory body in the kingdom, it was not a suitable forum for discussing major issues because many of the most influential men had no seat in it. The custom therefore grew up of the king’s summoning a more representative assembly to consider major questions of policy. William of Tyre uses the term curia generalis to describe such meetings and it has been adopted in the book. Such assemblies might be attended by whatever advisers the king chose to call. The normally included all important members of the High Court, the Great officers of state, the patriarch of Jerusalem and some of the Catholic bishops and abbots, the masters of the military Orders, and in certain circumstances representative of the Frankish burgesses.
성공적인 왕은 비교적 적은 수의 권력 있는 사람들과 조화롭게 일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 수는 약 40명으로 왕가의 다른 구성원들, 국가의 고위 관리들, 주요 왕실 신하들, 가톨릭 계급의 지도자들, 군사령부의 지도자들, 그리고 이탈리아 공동체의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예루살렘의 고위 궁정회의가 왕국의 최고 자문기구였지만, 1)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대거 불참해 주요 현안을 논의하기에 적합한 포럼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 관습은 왕이 보다 대표적인 의회를 소집하여 주요 정책 문제들을 검토하는 것에서 성장했다. 티레의 윌리엄은 이러한 회의를 묘사하기 위해 curia generalis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그것은 이 책에서 채택되었다. 그러한 모임은 왕이 부르기로 선택한 어떤 조언자들이라도 참석할 수 있었다. 보통 모든 중요한 고위 궁정회의 멤버들, 국가의 주요 관리, 예루살렘 총대주교, 가톨릭 주교와 대수도원장 중 일부, 군사령부의 지휘자들, 그리고 특정한 상황을 대표하는 프랑크인 시민들을 포함했다.
주석 1) The king was advised by the High Court, Composed of the tenants-in-chief of the crown. which had a triple function. It was judicial body that dealt with all civil and criminal cases relating to the king’s vassals, apart from those reserved to the church courts. Much of this business was of routine character, concerned with the conveyancing of property, and for that purpose the court was quorate if the king and three of its members were present. The High Court was also the king’s council which normally debated all important issues of policy, Finally, it had the power to enact law for the whole kingdom.
왕은 고위 궁정회의로부터 왕실의 영주인 신하들로 구성된 그들의 조언을 받았다. 여기에는 3중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교회의 법정으로 유보된 사건들을 제외하고, 왕의 신하들과 관련된 모든 민,형사 사건들을 다루는 사법기관이었다. 이 일들의 상당 부분은 일상적인 성격으로, 재산의 양도에 관한 것이었으며, 그 목적상 왕과 그 구성원 3명이 출석하면 법정은 충분했다. 고위 궁정회의는 또한 왕의 평의회였고, 일반적으로 정책의 모든 중요한 쟁점들을 논의하였다. 마침내, 그것은 왕국을 위해 법을 제정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 정리하면, 왕국의 입법, 사법, 행정을 모두 수행할 수 있는 기관이었다.
Yet although this machinery for broadly based discussion existed and was used, much of the responsibility for successful government rested with the king. Some of the more important men in the kingdom, for example the masters of the military Orders, were not his subjects, and a king needed in more than common measure, gifts of tact firmness and sound judgment of character to hold in check the sectional interests represented at those gatherings and to inspire their members with unity of purpose. Although the curia generalis was the most representative policy-making body in kingdom, it consisted only of Frankish members. The king had also to provide for the interests his non-Catholic subjects, and this traditionally had been done by treating with the head of their religious communities. This was an important royal function and one that was entirely personal to the monarch.
그러나 광범위하게 논의할 수 있는 이 기관이 존재했고 개최되었지만, 성공적인 정부에 대한 많은 책임은 왕에게 있다. 왕국에서 더 중요한 사람들, 예를 들면 왕국의 중요한 사람들 중 일부는, 예를 들면 군사령부의 기사단장들은 그의 신하들이 아니었고, 그러한 모임에서 대표되는 부분적인 이익을 견제하고 그들의 구성원들에게 목적의 통일성을 고취하기 위해 보통 이상의 방법으로 재치 있고 확고한 특징의 재능과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왕이 되는 것이 필요했다. 2) 비록 curia generalis은 왕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정책 결정 기구였지만, 그것은 오직 프랑크인 구성원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왕은 또한 그의 비-카톨릭 신민들에게도 이익을 제공해야 했고, 이것은 전통적으로 그들의 종교 공동체의 우두머리를 대접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것은 왕실의 중요한 기능이었고 군주에게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이었다.
주석 2) 사이먼 세벡 몬테피오리, <예루살렘 전기>
‘예루살렘을 지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왕들은 동급의 권력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며, 이슬람의 적들과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십자군 고위층, 야심을 가진 거물들, 거친 모험가들, 유럽에서 새로 도착한 무지한 사람들, 군사적 종교적으로 중립적인 기사단들, 음모를 꾸미는 사제들과 싸워야 했다.’
Because of his illness Baldwin must have found his royal duties very burdensome ; even if his civil functions were chiefly ceremonial and the main business of state was discharged by his ministers, he had to preside at meetings of The High Court, give audience to foreign envoys, receive the homage of vassals and carry out all the normal public duties of a king.
그의 병 때문에 볼드윈은 그의 왕실의 의무를 매우 무겁게 여겼음에 틀림없는데 비록 그의 민사 업무는 주로 의례적이고 그의 장관들에 의해 대체되었다 하더라도, 그는 고위 궁정회의를 주재하고, 외국 사절들을 접견하고, 신하들의 경의를 받고, 모든 정상적인 공공의 의무를 수행해야만 했다.
2. 왕의 군사적 위치와 왕실 재정
Such was the kingdom of which Baldwin IV was called to rule in 1174. Yet it should be emphasized that although strong devolutionary tendencies were at work in the state the powers of the crown were by no means negligible. The king was, of course undisputed commander-in chief of the army. Moreover the vast extent of the royal demesne in some measure acted as a counterpoise to the power of the magnates. The crown also possessed alternative sources of income; minting was a royal monopoly in twelfth-century Jerusalem, and in addition the king received taxes paid by Beduin tribesmen as well as the religious taxes of his non-Christian subjects.
1174년에 볼드윈 4세가 통치하도록 소집된 왕국이 바로 그런 나라였다. 비록 그 국가에서 강하게 지방으로 권력이 이행되는 경향이 작용하고 있었지만, 왕실의 권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왕은 물론 의심할 여지없이 군대의 총사령관이었다. 더욱이 왕실의 광대한 범위의 영지는 세력가들의 권력에 평형을 가지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왕실은 또한 수입의 대체적인 원천을 가지고 있었는데, 12세기 예루살렘에서는 화폐를 만드는 것이 왕실의 독점이었고, 추가적으로 왕은 베두인 부족민들에 의해 지불된 세금, 그러니까 그의 비기독교 신민들의 종교 세금을 받았다.
The king of twelfth-century Jerusalem also possessed considerable power of church patronage.
12세기 예루살렘의 왕은 또한 상당한 교회의 후원권을 가지고 있었다.
A successful commander in the Kingdom of Jerusalem needed to be able to work harmoniously with other military leaders, not all of whom were subject to him : the masters of the military Orders were in the category, while the rulers of Antioch and Tripoli were virtually autonomous heads of state.
예루살렘 왕국에서 성공적인 지휘관은 다른 모든 군 지도자들과 조화롭게 일할 수 있어야 했는데, 그들 모두가 그의 신하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군사령부의 기사단장들이 그 범주에 속했고, 안티오크와 트리폴리의 통치자들은 사실상 자치적인 국가 원수였다.
3. 다른 십자군 국가와의 관계
The states of Antioch, Tripoli and Jerusalem were autonomous. … the king had no right to intervene in Tripoli’s internal administration, while the count was not bound by treaties which the king made with foreign powers. Nevertheless it would be misleading to overemphasize the degree of separatism between the state; they had always been willing to assist each other when threatened by Muslim powers, and by Baldwin IV’s reign, as a result of intermarriage, all three ruling houses were closely related and this increased the likelihood of mutual intervention. Although there were important differences in some areas the political, military and social structures of Tripoli and Antioch had a great deal in common with those of the Kingdom of Jerusalem.
안티오크, 트리폴리, 예루살렘은 자치적이었다. 3) … 국왕은 트리폴리의 내부 행정에 개입할 권리가 없었다. 반면 트리폴리의 백작은 국왕이 외국 강대국과 맺은 조약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 간의 분리주의의 정도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항상 기꺼이 함께 해왔었다. 이슬람의 힘에 의해 위협을 받을 때 서로를 돕고, 볼드윈 4세의 치세 기간에는, 결혼의 결과로서, 세 개의 지배 집단은 모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고 이것은 상호 개입의 가능성을 증가시켰다. 비록 몇몇 영역에서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지만 트리폴리와 안티오크의 정치, 군사, 사회 구조는 예루살렘 왕국의 그것들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주석 3)
볼드윈 4세의 집권기에는 십자국 국가 중 하나인 진한 주황색인 에데사가 멸망한 상태였고, 파란색이 예루살렘 왕국, 연한 주황색이 트리폴리, 초록색이 안티오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