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시절. 한반도의 한인들에게 김좌진은 영웅이다. 신문에서도 김좌진의 모습은 멋지게 나왔고 한반도의 대중들은 김좌진을 존경했다. 그건 일본제국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귀순’조작을 하기도 했다. 김좌진이 ‘귀순’했다는 조작이다. 이런 거짓정보를 만들어 한반도 언론에 거짓선전을 하기도 했다.
한반도 사는 한인들의 존경심은 해방 뒤에도 이어졌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김좌진은 우리 한국사람들에게 큰 지지와 존경을 받고있다.
하지만 북만주 한인들에겐 달랐다. 김좌진이 독립운동을 하던 북만주에선 달랐다.
1. 북만주의 마왕 김좌진
1)
북만주에 사는 한인들은 가난했고 하루하루 먹기살기도 힘들고 괴로워했다. 그런상황에서 지주에게 돈을 내는 것도 힘겨웠다.
북만주 지역에 이주한 한인은 대부분 “무자력 농민”이었다고 한다. 기본이 되는 농기구조차 자기가 갖고 있지 못 했다. 또한 지주가 먹을 것을 제공해 주지 않으면 당장 굶어 죽게 생긴 사람도 많았다. 거기다 그런 이유 때문에 지주와 체결해서 소작관계를 맺을 때 농민은 처지가 너무나 불리했다.2
또한 북만주지역 한인들에게 도시는 멀었다. 땅은 넓은데 도시에는 벗어난 지역에서 생활했다. 그러니 이 지역 한인들에게 근대적 금융기관은 먼 곳이다. 그러니 돈이 필요하면 대부분은 은행이 아닌 중국인 지주에게 돈을 빌려서 빚을 지어야했다. 이 빚때문에 한인 농민들은 더욱 중국 지주에게 붙잡혀 살아야했다. 중국인 지주는 고리대금업자이자 상업자본가이기 까지 했다. 3
그런데 김좌진 세력은 북만주 한인들에게 강제로 돈을 뜯어냈다. 돈을 내는데 제대로 협조하지않으면 협박과 테러를 하며 위협을 했다. 그랬는데도 끝내 따르지않고 거부하면 죽여버렸다. 이런 테러활동에 대표적인 사람에는 이백호 라는 사람이 있다. 이백호는 신민부 군인세력의 중심인물인데 김좌진 장군에게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다. 4농민들을 살해하는 테러범을 김좌진 장군은 총애했던 것이다.
김좌진 장군의 그런 낌새는 1924년부터 드러난다. 김좌진은 1922년 북만주 일대에서 대한독립군단(본부는 중소 국경지대인 동녕현)을 조직해 총사령관을 하였다.
5김좌진은 1924년 3월부터 부령 11호를 발표했다. 자신들이 군자금을 요구하면 돈을 줘야하며 주지않으면 “중형”에 처하게 할 것이며 본 군단을 외국 관헌에게 고소하면, 그 외국관헌이 적국이 아니면서 신고자가 친일반역자가 아니라해도 죽여버리겠다는 것이다.
「<부령 11호>
제1조 각 지역에서 나라 일에 진력하다가 순직한 씨명을 조사해서 역사책에 기입한다.
제2조 나라 일을 위해서 부상 또는 환자에 대해서는 상당한 구휼을 한다.
제3조 적의 우롱을 받아서 귀순한 자와 생활을 위해서 일시적 수종 동화한 자에 대해서는 정상을 작량해서 벌하는 것을논의하고, 개정의정이 확실한 자는 사면한다.
제4조 본 군단의 징모대 또는 모연대를 적 또는 외국 관헌에 고발한 자는 극형에 처한다.
제 5조 본 군단에 있어서 징모한 병사로서 병역의 복무를 기피하는 자는 중벌에 처한다.
제6조 본 군단에서 청연한 군자금의 납부를 거절한 자는 중벌에 처한다.
대한민국 5년 3월
대한독립군단 총 사령과 김좌진」
[부령 제 11호] (흑룡강성 당안관 소장), 6
「<부령 제12호>
일금 5천 원정
위 금액은 본년 음력 4월 말 까지 본 사령부 경리부에 직접 난입해야 한다. 만약 기일을 어길 경우에는 부령 제11호 제6호에 의거하여 처벌한다.
대한민국 5년 음력 4월 20일
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 김좌진」
[부령 제12화](흑룡강성 당안관 소장), 7
일본제국은 조선(=대한제국)을 침략했고 한국사람들은 일본에게 국가를 빼앗겼고 자신들의 영토를 일본에게 강제점령을 당해야했다. 일본에게 강제점령 당한 영토는 한반도다. 하지만 만주는 아니다. 만주는 원래부터 다른 국가의 영토였다. 그런데 재만한인들은 친일반역행위를 한 것도 아닌데도 중국 관헌에게 김좌진 측 군인을 고발할 권리도 없었고, 돈을 필수로 내야했다. 물론 기존 중국 측에선 김좌진 측에게 정식으로 자치권을 허용해준 것도 아니다.
그 뒤 1925년 3월 10일. 북만주엔 신민부라는 새로운 조직이 생겨났다. 북만주에 있는 여러 단체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였다.8
신민부는 제도만 보면 창립 때부터 삼권분립을 하긴 하였다. 신민부에서는 원로들로 참의원을 구성해놓았고, 행정기관을 견제하는 검사원을 두었고 중앙행정위원회에 민사부 군사부 참모부 외교부 법무부 경리부 교육부 선전부 실업부 등을 두었다. 그러나 실제 조직 운영은 김좌진과 군정 세력이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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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후반부터 김좌진은 아나키즘을 수용하고 아나키스트와 연합했다. 신민부를 해체하고 혁신의회를 조직했다가 다시 해체한 뒤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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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김좌잔 세력이 벌인 테러는 당시 북만주 한인들에게 악명이 높았다.
이러한 김좌진 측의 테러활동은 여러자료가 증언하고 있다.
2) 동아일보
당시 김좌진 측의 테러는 한반도의 언론인 동아일보에도 실릴정도였다.
「신민부원체포. 중국 연길도윤은 훈춘 방면에서 활동하는 신민부원들이 군자금을 구하다가 응하지 않는다고 조선인 다섯명을 살해한일이 있음으로 각현에 체포령을 내렸다가 며칠전에 잡히였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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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부원과 주민충돌 여섯명 사상의 대참극
자금 모집 관례로 충돌되어
북만빈주현에서 돌발
북만빈주현에서는 지난달 그믐날 저녁 여섯시경에 신민부원이 그곳 주민 다섯, 여섯명을 살상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그 원인은 빈주현은 본래 신민부구역으로 오래전부터 ○○운동비로 주민들로부터 돈을 거두어갔는데 근자에 이르러 주민일동은 주민대회를 열고 신민부로부터 탈퇴하기를 결의하고 이 소식을 신민부에 통지하였더니 그말을 들은 신민부원들은 무장대 다섯, 여섯명을 보내어 주민과 충돌되어 그와 같은 참극이 생긴 것이라는 바. 류연동, 김봉진, 황혁 세 사람은 즉사하고 윤필한, 김유문, 장문숙 세 사람은 중상하여 목하생명이 위태하며 그밖에도 경상자가 많은 모양이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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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측근 – 청뢰 이강훈 증언
김좌진의 측근 이강훈도 그 점을 증언했다. 이강훈은 김좌진 장군의 측근인데 그런 측근조차 김좌진 측의 부당한 테러 활동을 증언하며 변호는 커녕 어떠한 변명조차 하지않고 있다. 또한 휴머니즘이 없는 테러리스트라고 말하기 까지 한다.
「김좌진 장군은 저자가 그 밑에서 오랫동안 일해왔기에 그의 생리를 누구보다도 잘안다고 자부하는 일장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저자의 소견으로 김좌진장군의 치명적인 결점은 사람을 잘못 쓰는 데 있다고 본다.
총을 잘 쏘고 모험을 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중용하는 인사경향 때문에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진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북만주에서의 이른바 빈주사건이며, 집안 동생되는 김종진 학살사건도 이백호 박래춘 등 잔인한 사람들에게 모험을 잘한다고 무기를 주고 자유롭게 풀어 놓은 결과였다. 일제의 무리배나 그 주구 외의 동족에 대한 살상은 신중히 검토한 뒤에 혁명적 규범에 따라 처벌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동안은 난장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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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북간도에서부터 동경하던 바와는 달리 민족 진영에 대한 실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조국 광복이라는 대전제 밑에 모여든 인사들인만큼 항일의식은 욱일승천의 세를 이루고 있었으나 행동은 제각기였고 이율배반적인 모순들을 안고 있었다.
이점에 대해서는 내가 경애하던 김좌진 장군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사람을 선택하는 면에 있어서 부족한 점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모름지기 적을 없애는 데는 용기와 예지, 기술 모두 필요하지만 특별히 없어서는 안될 것이 참된 휴머니즘이다. 참된 테러리스트는 최고의 휴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백호 라는, 총을 잘 쏘는 자가 있었다. 그는 어떤 인연에서인지는 몰라도 신민부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러다가 지방 출장까지 가게 되었다. 그런데 동빈 지방에 가서 거류 동포들이 말을 잘 안 듣는다고 총을 난사하여 여러 사람을 사살한 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최고 책임자인 김좌진 장군에게 갖은 악평이 퍼부어졌고 크게는 신민부 해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나중에는 김좌진 장군의 족제되는 시야 김종진과 이준근 및 김야운 등도 이백호 무리에게 학살을 당해 민족적 손실을 보게 되었다. 그밖에 이백호는 경박호에 살던 김만산이라는 중국 통역도 살해해 그가 입었던 옷까지 입고 다니는 행패를 부는데 결국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타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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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같은 진영 – 정화암 증언
같은 아나키즘 진영이지만 측근보다는 거리가 먼 사람의 증언도 있다. 정화암의 증언이다. 정화암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내가 현장에서 직접 보니 한족총련의 활동 가운데도 문제가 없지 않더군요. 이것은 정말 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합시다. 그 가운데는 질이 좋지 않은 사람들도 있더란 말입니다. 악한이라고 부를만한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뭘 하는고 하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 넓은 지역에서 자기네가 중앙총본부라 해가지고 각 지역을 다니며 우리 농민들을 착취하는 것입니다. <중앙총본부에 세금을 내라> — 그래서 그것 갖고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저 중국의 사천성에서는 10년 뒤의 세금까지 미리 거뒀다더니.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놈들이 총들고 와서 계집도 빼앗아가고 소도 잡아가고 하는, 이런 일들이 있었거든요. 공산당원들 눈으로 볼 때는 이런 종자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싸움이 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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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암의 증언을 따르면 김좌진 세력(“한족총련”, “중앙총본부”) 은 농민을 약탈하면서 위협했다. 그 탓에 공산당들이 분노하여 싸움을 걸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정화암과 아나키즘 세력은 공산당과 죽기살기로 싸웠다. 공산당에게 죽을까봐 두려움에 떨기까지했다.
「만주에 있을 때 왜놈보다도 우리 동포인 공산주의자가 무서워 잘 때도 신을 신고 옷을 입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을 보초로 세워놓고 두가지를 경계하게 했습니다. 우리 동포 공산당원이 넘어오느냐? 왜놈이 넘어오느냐? 이 두가지를 경계하게 했습니다. 그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한 쪽이라도 온다고 하면 신을 신고 옷을 입고 자다가 벌떡 일어나 대처해야 했습니다. 내가 만주에서 몇 해 동안 직접 겪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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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공산당에게 위협당하고 대립하던 사람인데도 위같이 증언한다.
5) 김좌진 살해 세력 – 공산당측 증언
훗날 공산주의자 측 인물도 그점을 증언했다.
양환준이 말하길 지혜겸에게 이런 증언을 들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근거라면 지혜겸선생(같이 공산당을 했고 조국이 광복된 후에 연변대학 역사과 주임교수가 됨)이 말씀하기를 (…) “한번은 금방 조선에서 망명해 들어오는 사람을 붙잡아 내리고 공산당 혐의 분자라고 때리다가 공산당이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자 돈 500원을 내면 놓아 준다고 했답니다. 그의 가족이 급히 조선으로 되돌아나가 안달복달 500원을 구해가지고 돌아와 보니 사람은 벌써 죽은 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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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의 증언 하나만 보면 정말인지 모함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위의 증거들을 보듯이 증언내용과 비슷한 증언은 김좌진 세력 측에서도 나오고 있다. 공산당 측이 일방으로 주장한 거짓말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6)원홍기의 증언
원홍기 라는 사람은 이렇게 증언한다.
「신청룡이 북로군정성서 리탈하여 흑룡강성 동빈현에 가서 혁신군을 조직했고 김좌진은 1924년에 흑룡강성 해림현에서 신민부를 조직했다. 김좌진과 신청룡과의 모순내막은 모르나 갈등이 심한 나머지 김좌진이 두번이나 암살대를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1926년 전에 김좌진이 두번이나 암살대를 파견하여 신청룡을 살해하려했으나 혁신군의 경각성이 높아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1926년 가을에 8명의 혁신군대원들이 희생되자 (일본에게 희생당했다고 함 – 옮긴이) 혁신군에는 세자루의 무기밖에 없었다. 이 정황까지 알게된 김좌진은 1927년 9월에 세번째 암살대를 파견했다. (…)
아버지와 형님이 쌀팔러 떠나간 바로 그날 (…)나는 그때 13살이므로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이였다. 갑자기 중국족도리모자를 쓰고 다부산즈를 입은 조선사람이 교실에 불쑥 들어오더니 선생과 학생을모두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가는 그때 그 교실에 있었다. 다른 두 암살대를 (…) 원재룡(원홍기 아버지 – 옮긴이)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로친의 뺨을 후려치며 총을 내라고 협박했다. <당장 대놓지 않으면 집에 불을 지를테다> 갑자기 떨어진 불호령에 한농촌녀인이 어찌 버틸 수 있었겠는가. 이불속에 감추어두었던 두 자루의 권총(부로링과 6철포)을 내놓았다. 이제 혁신군에는 신청룡의 쌰즈 한자루밖에 없다는것까지 알고 신청룡의 집을 습격했다. 신청룡의 부인이 홀로 집에 있었다. 집수색을 했으나 딴띠를 발견했을뿐 쌰즈는 가지고 나간것이 분명했다. 6명의 암살대는 현성에 간 신청룡이 마음로 돌아올 때 잡으려 계획했다. 그들은 우리 집에서 점심까지 해먹고 떠나갔다. (…)신청룡의 행방까지 알게 된 암살대들은 걸음을재촉해 먼저 리전갑의 집을 포위했다. 이때 보슬비가 내렸다. 암살대 두 사람이 열려진 문으로 들여다보니 신청룡과 리전갑이 누워서 약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두 암살대는 갑자기 뛰어들어 몽둥이로 신청룡의 머리를 내리치고 무기를 압수했다. 원래 체력이 약한 신청룡은 머리까지 얻어맞았는지라 꼼짝 못하고 묶였다. 암살대들은 손쉽게 신청룡을 끌고 나와 마을에서 1리가량 떨어진 수수밭속에서 암살했다.
신청룡은 당시에 혁신군 대장이면서 내가 다니던 동빈현 북류수하 진단학교 교장이였다. 교장이 사망했으니 우리 고급학년학생 10여명이 마을에 있던 혁신군대원들과 함께 사건현장으로 갔다. 13살인 나도 고급학년 학생이라 현장에 가서 신청룡의 주검을 보았다. 신청룡은 길에서 대여섯이랑 들어온 수수밭속에서 머리에 두방의 총을 맞았었다. 신청룡과 사이좋게 지내던 동빈현 주둔 지방부대에서도 군관이 여러명 왔고 지방부대에서 돈을 내여 중국식관을 사서 후하게 안장해주며 후사처리비용을 전부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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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북만주한인들이 김좌진에게 붙힌 별명
북만주에서 김좌진 장군은 점점 존경심을 잃어갔다. 사람들에게 김좌진 세력과 테러는 무서운 존재였다. 북만주 한인들은 김좌진 장군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마왕”. 사람들은 김좌진을 “마왕”, “폭군”이라고 부르며 무서워하고 멸시했다.19
김좌진 장군은 북만주 재만한인사회에서 마왕처럼 군림했고,재만한인들은 그런 김좌진 장군을 점점 멀리했다.
2. 김좌진 장군이 살해된 이유
1930년 1월 24일, 김좌진 장군은 누군가 쏜 총탄에 맞아 살해된다. 20총을 쏜 사람은 “박상실”이다.
「안내하는 청년이 손을 들어 가르키기를 저거 저집이 금성(金城)정미소인데 저 정미소 앞에서 백야가 암살을 당한 것이라고 한다. 기자는 그 현장을 어서가서 보았으면 하는 조급증이 나서 가는 걸음이 아니가는 하는 감이 없지 아니했다. 급심 그 현장인 정미소에 당착하야 보니 쓸쓸한 벌판이다. 백야가 구경하다가 참변을 당한 풍차가 아득 그대로 놓여 있는데 백야가 참변을 당할 때에 뒤로 몇발자국 걸어나오다가 무참히 절명을 한 것이라고 청년은 지점을 가르치며 설명하여 준다. 기자가 말을 들으며 그 진경을 머리에 보다가 이것이 조선 사람으로서야 할일이냐 하는 죄감이 나서 눈물이 아니 흘릴 수 없었다……안내하는 청년은 그 범행을 한 박상실이가 그 시(時)에 남편(南便)인 저 산 밑으로 도주 하였다고 하면서 참변시에 동정(同情)하던 한이근(安利根)씨가 범인을 쫓아가는 동시에 이 참변의 급보를 접한 당지 중국육군 8·9명이 진(進)하야 추격하였으나 범인은 저앞에 있는 산으로 넘어가서 산중에 잠적하야 버렸으니 얼마동안 수색하여 밀강(密江)으로 달아나는 것은 계속 추격하였으나 마침 날이 저물러서 잡지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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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실”이란 이름은 진짜 이름이 아니다. 본명은 이복림이고 공도진이라는 이름도 쓰며 다니기도 했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공도진을 김좌진측 조직쪽으로 보냈다. 공도진은 “박상실”이란 이름을 쓰며 잠입을 했고 결국 김좌진 장군을 쏘아 죽이고 도망쳤다.
공도진은 화룡현 이도구 명암촌 사람인데 이전부터 사회주의 운동을 한 듯 하다. 그러다 자신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경찰에 체포당해 일본경찰서를 압송을 당했다. 그러던 중 일본경찰들을 밀쳐서 해란강물에 처박아넣고 그길로 몸을 피해 1928년에 북만주로 갔고 1928년 8월에 영안현으로 와서 활동했다. 1930년 10월에 10월에 중국공산당 아성현위(阿城縣委) 서기로 임명되었다가 그 후 다시 珠河縣(주하현)(지금은 상지현尚志縣) 조직부장과 주하항일 유격대 당지부서기, 동북항일유격대 합동(哈東)지대 당위서기,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 군법처장, 항일연군 제3군 제1사 정치 부주임 겸 합동지대사령, 중공북만 임시성위조직부장, 항일
연군 3, 6, 8, 9군 연합 의동판사처(依東辦事處)주임 같은 일을 맡았다. 그러다 1937년 4월 흑룡강 통하연 이도하자에서 일분군 수백명에 포위당했다. 공도진은 이 때 일본군에게 저항하며 전투하다 사살됐다. 22상당히 적극적인 항일운동가였는데 당에게 지시를 받고 김좌진 장군을 살해했다. 이 세력은 왜 김좌진 장군을 죽였을까?
김좌진을 죽인 가해자 측근들은 일단 김좌진을 친일반역자라 주장한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가 떠 돈 이유는 일본제국의 선전 때문이다. 일본제국은 1923~1924년에 김좌진 장군이 ‘귀순’했다는 ‘귀순설’을 조작하여 선전하였고 김좌진은 한 때 억울하게 친일반역자로 모욕을 당한 적이 있다. 23이런 선전과 달리 실제 일제내부 문서를 보면 김좌진은 절대 친일반역자가 아니었다. 1924년 4월 9일 일본내부문서 따르면 김좌진은 죽어도 일본에 귀순할 마음이 없고, 의지가 확고하며 일본이 다른 국가와 전쟁을 하면 일본과 맞서 싸우기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24
그러니 적어도 친일이란 주장은 누명이다.
근본이 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 이유는 1928년 11월, 북만주 빈주현에 있던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만주 빈주현은 원래 신민부에서 돈을 걷어가던 지역이다. 그러나 빈주현 주민들은 더 이상 신민부와 연결되기를 거부햇다. 주민들은 주민대회를 열고는 신민부에서 탈퇴하기로 결의하고 신민부에 그것을 통지했다. 김좌진의 부하25들은 무장을 하고 빈주현 에 들이닥쳤고 주민대회장에 총탄을 퍼부었다. 류연동, 김봉진, 황혁은 곧바로 죽었고 윤필한, 김유문, 장문숙은 중상을 입었고 그 밖에 여러사람이 총탄에 맞았다. 26
이 사건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뿐만 아니라 같은 신민부원인 최호 진영도 적극 비판했다. 최호 진영에서는 “민중의 생명을 학살하고 혁명전선의 교란자, 매족적 주구(賣族的 走狗), 혁명적 사기한의 장본인 김좌진, 정신(鄭信) 등을 매장하라”고 강하게 규탄했다. 27
그리고 1930년 1월 24일에 산시참에서 “박상실”(=공도진)에게 총탄을 맞고 살해됐다.
일본내부기밀 문서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김좌진 일파에 대한 지방의 반감으로 특히 빈주사건의 피해자 가족들 그리고 재중청년동맹의 일파는 계속 김좌진의 살해를 계획해 왔다. 지난 달 25일 그는 중동로 산시참에서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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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주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김좌진을 죽였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 위에서 썼던 정화암 선생의 증언을 다시 보자.
「내가 현장에서 직접 보니 한족총련의 활동 가운데도 문제가 없지 않더군요. 이것은 정말 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합시다. 그 가운데는 질이 좋지 않은 사람들도 있더란 말입니다. 악한이라고 부를만한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뭘 하는고 하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 넓은 지역에서 자기네가 중앙총본부라 해가지고 각 지역을 다니며 우리 농민들을 착취하는 것입니다. <중앙총본부에 세금을 내라> — 그래서 그것 갖고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저 중국의 사천성에서는 10년 뒤의 세금까지 미리 거뒀다더니.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놈들이 총들고 와서 계집도 빼앗아가고 소도 잡아가고 하는, 이런 일들이 있었거든요. 공산당원들 눈으로 볼 때는 이런 종자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싸움이 났」다고 증언한다.
공산당에게 테러위협을 받고 공포에 떨던 사람조차 한족총련(지난날 신민부) 사람들이 협박하고 강탈하니 공산당원을 분노해서 싸움이 났다고 증언한다. 일본내부기밀 문서는 실제 정황과 그대로 들어맞는다.
가해자들이 김좌진 장군을 노리고 죽인 이유는 분명했다. 김좌진 측 테러에 대한 복수였다. 그러나 어째 사람들한텐 ‘공산당이 김좌진 장군을 죽였다’정도로만 알려진 듯 하다.
3. 아들 김두한
해방직후 한반도에서 좌익진영이 세력이 강했고, 김두한도 자신의 오랜 친구 정진용과 함께 좌익 단체인 조선청년전위대에서 정치깡패로 일하게 된다.29
그러다 우익진영인물을 만나 교육을 받는다. 자신의 아버지가 공산당에 죽었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당시 극우 정치세력은 김두한을 자기네 진영으로 적극 포섭하려 했다. 당시 좌익은 한반도에서 세력을 압도했을뿐만 아니라 폭력배, 깡패들을 청년조직에 끌어들이는 상황이었다. 이렇기 때문에 김좌진의 아들인 김두한을 자기세력으로 끌어들이려 한 것이다. 30
김두한의 전향은 민족주의 사상을 이끌어내는데도 도움이 됐다. 김두한이 우익으로 전향한 덕에 김좌진이 공산주의자에게 죽은 사실을 널리 알릴 수 있게 됐다. 덕분에 민족주의 분노 = 우익의 분노를 하나로 만들 수 있기도 했다. 또한 친공산주의 계열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게 하는데도 도움을 줬다. 31
결국 김두한은 자신의 친구 정진용과 상의도 하지않고 조선청년전위대 해산을 주장했다. 그 뒤 조선청년전위대원 약 600명 중 470명가량은 김두한을 따라서 조선청년전위대를 탈퇴하고 나머지 130명 정도만 정진용 측에 남게 된다. 32
김두한은 그 뒤 대한민청에서 백색테러리스트로 활동했다. ‘9월 총파업’때는 “대한민청은 김두한 감출부장을 선두로 해서 이른바 싸움이라면 둘째가기 싫어하는 정예대원이었으므로 때를 만났다고 오히려 기뻐”33하면서 좌익 진영 시위자들과 호응한 노동자들을 때려 잡았다.
그말고도 김두한은 대한민청에서 자신의 부하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공갈, 협박을 하며 돈을 뜯어다니기도 하였다. 34
김두한은 나중에 ‘시공관 사건’을 벌였고 그 탓에 미군에게 잡히게 된다. 1947년 4월 20일. 좌익진영은 이승만을 반대하는 유인물을 배포했다. 그 때 좌익정치깡패 세력이 그 사람들을 보호했는데, 정진용과 악단제일선, 그리고 조선전위대(심영이 그렇게 외쳐대던 그 “전위대”) 란 폭력배 조직이다. 김두한은 원래 이승만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던 상황인데 그걸 보자 임무를 벗어나서 욱하고 말았다. 김두한 국제극장으로 쳐들어가 정진용과 다른 좌익세력을 납치했다.
김두한은 정진용과 오랜 친구였다. 35 그래서인지 김두한은 “정과 그의 부하들을 우익으로 끌어당기기 위해서 정과의 우의를 돈독하게 하려고 노력”36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게 되지 않았다.
김두한은 처음에 “서울의 거리에서 정과 정의 부하 두명을 때렸다. 다음에 정이 김에게 권총을 겨누었으며 김 역시 정에게 권총을 겨누고 정의 권총을 떨어뜨린 후 정의 무릎에 총을 쏘았다.” 1947년 4월에 이승만이 귀국하려 했다. “정진용과 그의 무리들은 이승만을 사기꾼이고 자기중심적인 정치인이라고 비방하는팜프렛을 배포하기 위해서 동원되었다. 4월 20일, 김두한은 이 시점이 그의 오랜 친구를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는 부하들을 보내서 반 이승만 유인물을 배포하는 사람들을 잡아오게 했다. 김의 부하는 극장과 서울의 시장거리를 배회하면서 정과 그의 부하를 잡아들였다. 김과 그의 부하들은 그들이 그들의 과거의 잘못을 인식하기를 희망하면서 이들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폭행은 길고 단단한 일본 단풍나무로 만든 몽둥이로 행해졌다. 정은 박헌영 부재 시 남로당의 대표였던 허헌에게서 명령을 받았다고 했고 그는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모든 명령에 복종한다고 말했다. 그는 심지어 이승만을 역적이라고 말했다. 이 순간에 김이 이성을 잃고 정의 가슴을 찼다. 그는 그의 오랜 친구에게 철회를 요구했지만 정은 거절했다. 김은 또 한방을 더 때렸고 그것으로 인해 정은 체내 출혈이 시작되었고 곧바로 죽었다.” 37
이 때문에 김두한은 재판을 받게된다. 범죄가 너무 명확한 터에 높은 처벌을 받아도 할말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김두한을 두둔하고 나섰는데 그중 하나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1948년 3월 20일에는 이청천 장군과 이범석 장군을 공동성명을 내고
하지 중장에게
진정서를 냈다.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의 實子(진짜 아들)이니 특별 고려할 것’이라는 감형진정서였다. 38
이청천 장군과 이범석 장군 같은 적극적인 항일운동가들도 김두한을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두둔하고 나선 것이다.
김두한과 그 세력은 결국 이 사건 때문에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김두한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백색테러 활동을 계획했다. 군정장관 대리인과 CIC요원 한명, 그리고 김규식 선생같은 분을 죽이겠다는 계획이다. CIC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형무소에 모두 1947년 4월에 불법화 된 대한민청 단원으로 구성된 9명이 투옥되어 있었다. 이들은 테러활동으로 투옥된 악명 높은 김두한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감옥 밖에 있는 3명의 도움을 받으면서 군정장관 대리인 핼믹(Helmick) 장군과 CIC 요원 중 한 명으로서 부대 지휘관인 사람을 암살하려 했다. 후자는 한국어와 일본어를 말할 수 있는 건장한 사람이었다. 또한 김규식 박사를 포함한 5명의 저명한 한국인 인사도 살생부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사용될 무기의 종류는 권총, 수류탄, 시한폭탄, 폭약으로 가득 찬 파이프 담배 크기의 수동 폭약장치 등이었다. (…)김두한은 감옥에 있는 사람들 이외에 1946년 후반부터 그를 위해 일해 온 10명의 중국인 깡패를 고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간수 중 몇 명은 그 집단의 뇌물을 받아서 김두한과 바깥의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구두 또는 문서화 된 메시지를 전달하였다.」39고한다.
김두한의 음모에 희생될뻔 한 김규식 선생
미군은 무기장소첩보를 입수하고 무기들을 찾아다녔다. 대부분은 사실과 달랐지만 한 곳에서 테러에 쓸 수 있는 무기를 발견해서 압수했다고 한다. 김두한은 마지막까지 엄청난 테러를 계획했던 것이다.
그 뒤 “1948년 8월 15일 한국은 이승만 정권 하의 독립국가가 되었다. 곧이어 김은 석방되었다. 김두한은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했고 그의 이름을 정확하게 쓸 수 없을 만큼 무식했다. 이승만 정권에 의해 출옥했을 때, 어느 부유한 한국 여인의 보호 하에 들어갔고 그녀는 그에게 한국 고전과 한국 기사도를 가르쳤다. 한국전쟁 후 김두한은 대한청년단의 감찰부장이 되었고 이승만의 개인 보디가 되었다.”고 한다.40
사실 인터넷의 편견과 다르게 김두한이 해방 이후 벌인 테러행적은 자신의 아버지와 유사했다.
4.
아버지인 김좌진 장군과 아들인 김두한. 두 사람은 활동당시 주변 사람들에겐 테러로 악명이 높았고 분명한 사료들도 있다. 그러나 정작 현재 우리나라 사극에서는 이런 면은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그 예가 야인시대다. 위의 정진용 세력 납치 테러 사건만 봐도 가해주체를 완전히 왜곡해 놓고 있다. 드라마와 달리 실제 사건은 명백히 김두한이 연속으로 납치행위를 한 뒤 살인을 한 테러사건이다.
또한 김좌진 장군 문제도 그렇다. 그냥 공산주의측에게 죽은 것만 나오고 어쩌다 죽은건지 무슨 활동을 한건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김두한의 시점이니깐 그런거면 이해해줄 수 있다. 문제는 야인시대를 보면 김두한과 무관한 사건들도 나오기도 하고 내레이션으로 자세히 설명해주기 까지 한다. 그런데 정작 김두한이 백색테러를 하게 된 계기가 된 김좌진 장군의 후반 활동만은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주석_
1.
김좌진의 존경받고 인기얻는 과정은 김인호, 「김좌진의 항일 인맥과 민족 이미지의 형성과 전개 -반도의용정신대와 대한민청을 중심으로」, 『崇實史學 第34輯』 참고할 것
2.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 아세아문화사, 1999, 50쪽
3.
신주백, 같은책, 50쪽
4.
박환, 『만주벌의 항일영웅 김좌진』, 도서출판선인, 2016, 205쪽
5.
박환, 같은책, 2016, 163쪽
6.
박환, 같은책 2016, 165쪽에서 재인용
7.
위와 같음
8.
박환, 같은책, 2016, 167쪽
9.
신주백, 같은책, 1999, 93쪽; 신주백, 1920-30년대 중국지역 민족운동사, 선인, 2005년
10.
이호룡,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 – 혁명근거지 건설을 위한 활동을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6』, 2001, 290 – 292쪽; 이호룡, 『한국의 아나키즘 운동편』, 지식산업사, 2015, 339-340쪽
11.
“신민부원 체포”, 동아일보 1926. 12. 14,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6121400209202009&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6-12-14&officeId=00020&pageNo=2&printNo=2254&publishType=00020# (검색날짜: 2017. 7.9)
12.
“신민부원과 주민충돌 여섯명 사상의 대참극”, 동아일보 1928.11.18,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811180020920202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8-11-18&officeId=00020&pageNo=2&printNo=2959&publishType=00020# (검색날짜 2016. 7. 9)
13.
이강훈, 『이강훈 역사증언록』, 서울: 인물연구소, 1994, 90쪽
14.
이강훈, 『민족해방운동과 나』. 서울:제삼기획, 1994, 97~98
15.
「3부 정화암」, 면담: 이정식; 편집해설: 김학준; 수정증보: 김용호,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 김성숙·장건상·정화암·이강훈의 독립투쟁』, 서울: 민음사, 2005, 371쪽
16.
같은책, 365쪽
17.
[양환준선생방문록](강용권발표), 박영석, 「白冶 金佐鎭將軍硏究」, 『國史館論叢 第51輯』, 207쪽
18.
강룡권, 『동북항일운동유적답사기』, 연변인민출판사, 2000, 308-310
(어째서인지 RISS에선 “강용권, 동북항일유지고찰기 : 장편답사기”라고 뜬다.)
19.
박환, 같은책, 2016, 205쪽; 이호룡,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 – 혁명근거지 건설을 위한 활동을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6』, 2001, 291쪽; 이호룡, 『한국의 아나키즘 운동편, 지식산업사』, 2015, 339쪽
20.
박영석, 國史館論叢 第51輯, 국사편찬위원회, 1994, 202; 박환, 같은책, 2016, 185쪽
21.
‘백야조문가는 길에’ 〈조선일보〉 1930년 3월 11일자, 박영석, 같은책 205쪽 에서 재인용
22.
박영석, 같은책, 208쪽; 박창욱, 인물연구 김좌진 장군의 신화를 깬다, 역사비평 , 1994.2, 176~177쪽
23.
김광옥, 김좌진과 김사국, 6~7쪽, 인문논총 14, 1999, 64~65쪽, 김인호, 같은책 278쪽
24.
김광옥, 같은책, 7쪽, 65쪽
25.
테러행위자 중 하나가 이백호다. 박영석, 같은책, 199쪽. 위에서 말했듯이 김좌진에게 총애받던 자다. 김좌진 측 대원들이 맞다.
26.
“신민부원과 주민충돌 여섯명 사상의 대참극”, 동아일보 1928.11.18,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811180020920202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8-11-18&officeId=00020&pageNo=2&printNo=2959&publishType=00020# (검색날짜 2016. 7. 9)
27.
박영석, 같은책 199쪽
28.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일본 본국에 보낸 보고” , 1930년 2월 27일, 일본외무성 경찰사, 일본외무성육해군성문서(마이크로필름), SP205-4, 12886쪽, 김광옥, 같은책, 5쪽, 63쪽에서 재인용
29.
김봉진, 미군정기 김두한의 ‘백색테러’와 대한민주청년동맹, 5쪽, 대구사학 97, 2009, 39쪽
30.
김봉진, 같은책, 6-7쪽, 40-41쪽
31.
김인호, 김좌진의 항일 인맥과 민족 이미지의 형성과 전개 -반도의용정신대와 대한민청을 중심으로, 崇實史學 第34輯, 285쪽
32.
김봉진, 같은책 6쪽, 40쪽)
33.
US Army lnteligence Center, History of the Counter Intelligence Corps, XXX: CIC During the Occupation in Korea(March 1959), p.76, 김봉진, 같은책, 12쪽, 46쪽에서 재인용
34.
김봉진, 같은책 10쪽, 44쪽)
35.
미군문서에도 “김의 제일 친한 친구는 정진용”이라고 나와있다. US Army lnteligence Center, History of the Counter Intelligence Corps, XXX: CIC During the Occupation in Korea(March 1959), p.92-94, 김봉진, 같은책, 21쪽, 55쪽에서 재인용
36.
HQ, USAFIK, 971st Counter Intelligence Corps Detachment, “Annual Progress Report For 1947”, pp.90-91, 김봉진, 같은책, 20-21, 54-55에서 재인용
37.
US Army lnteligence Center, History of the Counter Intelligence Corps, XXX: CIC During the Occupation in Korea(March 1959), p.92-94, 김봉진, 같은책, 22, 56에서 재인용
38.
김인호, 김좌진의 항일 인맥과 민족 이미지의 형성과 전개 -반도의용정신대와 대한민청을 중심으로, 崇實史學 第34輯, 285쪽
39.
“Annual Progress ReportFor 1947”, pp88-89, 김봉진, 같은책, 35-36, 69-70에서 재인용
40.
US Army lnteligence Center, History of the Counter Intelligence Corps, XXX: CIC During the Occupation in Korea(March 1959), P. 95 ,김봉진, 같은책, 32, 66에서 재인용
출처 : 개드립 – 북만주의 마왕 김좌진과 아들 김두한의 테러활동 ( https://www.dogdrip.net/132907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