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이다. 너무 부끄러워서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이야기를 모아 보았다.
이 글을 보고 화가 나도 당연할 것이다.
익숙하지 않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을 마주할때 나는 다음을 생각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적어 본다.
1. 한국독립문의 독립은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뜻하고 독립문의 현판은 이완용이 쓴것이다.
1924년 07월 15일 동아일보
“교복동 큰 길가에 독립문이 있습니다. 모양으로만 보면 프랑서(볼란서) 파리에 있는 개선문과 비슷합니다. 이문은 독립협회가 일어났을 때 서재필이라는 이가 주창하여 세우게 된 것이랍니다. 그 위에 새겨있는 ‘독립문’이라는 세 글자는 이완용이가 쓴 것이랍니다. 이완용이는 다른 이완용이 아니라 조선귀족 영수 후작각하이올시다.
2. 이완용은 당시 고종의 대리인으로서 활동했던 사람이다.
오늘날 고종은 좌파에서 띄워놨는데 사실 이완용은 고종의 대리인으로서 일본과 협상했다.
고종은 아관파천등 국제정세를 읽지 못해서 삽질만 반복했던게 사실이었고
이완용은 조선을 넘겨주는 대신 조선의 왕실을 보존하는 협상을 이끌었다.
정말 어떤 의미로의 애국자가 있다면 이완용이다.
3. 당시 조선의 군대는 8천명이었다.
1개 사단조차 되지 못한것이 조선군대의 현실이었으며, 애초에 이 규모로 일본과 싸운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고 생각한 이완용은 고종의 대리인으로 조선의 이익에 부합하게 개화하는 조건의 합병과 왕실 보존을 택한다.
4. 동학농민운동하면서 전국을 피폐하게 만든 전라도 사람들이 나중에 송병준과 일진회를 조직하여 일본에 한일합방 ‘청원’을 하였다.
동학농민운동을 단순히 독립운동으로 생각하는데, 동학농민운동의 일원이었던 사람들은 나중에 일진회를 조직하고 일본에 한일합방 청원을 냈다.
거기에 흐름을 보면
전봉준 동학군 봉기→청나라 원병 파병→일본군 조선 파병→청일전쟁→러일전쟁→을사늑약→조선 망국
으로 동학군의 봉기가 일어나자 조선왕실이 진압할 능력이 없어서 외세를 끌어들이는 계기가 된다.
5. 일제시대때 일본인들이 금지하기 전까지 조선인들은 만동묘<현재도 있음>라는 사당을 만들어 놓고 이미 오래전에 멸망한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왔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만동묘를 기리기 위한 사당을 일본군이 없애버리기 전까지 명나라 황제 제사를 지냈다.
6. 일제가 근대교육을 하려는데 시설이 없어 향교에서 교육을 하자고 하자 모든 향교가 들고일어나 시위를 하고 금지했다.
이유는 향교에서 수학 과학등의 신교육을 하면 공자님의 혼령이 어지러워하신다는 이유였다.
역사 교과서에는 이걸 일제의 문화침탈이라고 썼다.
7. 김구를 죽인 안두희는 군인출신으로서 당시 김구가 살해당한 가장 큰 원인은 한국이 통일만 할수있다면 공산주의어도 좋다고 생각한 ‘민족주의자’였고 몰래 김일성을 만나서 꼬봉짓하고 돌아다닌것이 가장 컸다.
김구는 민족주의자로 민주주의, 공산사회주의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통일을 위해서라면 공산주의도 좋다고 생각하였으며, 이승만은 북한이 공산주의를 포기하지 않을것을 예상하고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할려고하자 이를 반대한다.
과수원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