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바다 : 포루투칼의 식민지, 그리고 베네치아(베니스) 상인
지난 번에 이어 이번에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적어 볼까한다.
중세 시대 베네치아의 독점 무역을 깨기 위해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로 돌아가는 항해를 시도하였고, 이를 성공을 발판삼아 한순간의 유럽의 변방국가가 한순간에 강국이 된다.
그리고 이 식민지는 항해 무역에 중요한 요소 였고, 중세 식민지부터 오늘날까지 알아보자
●포르투갈의 아프리카식민지와 내륙의 브라질
포르투갈의 식민지는 크게 브라질과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식민지로 구분된다.
브라질 같은 경우는 내륙 깊숙히 식민지화가 되었지만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식민지들은 주로 섬지역과 거점지역 그리고 해안가에 위치한걸알수있다.
아프리카의 앙골라나 모잠비크의 경우 19C말에 내륙까지 개발되었다.
그렇다면 포르투갈은 왜 식민지를 만들었을까?
초록색의 포르투갈 지도를 보면 알수있듯이 포르투갈은 강력한 카스티아(스페인)과 국토를 접하고 있어 내륙을 통해 진출할수가 없었다.
포트루갈의 건국역사부터 이슬람 세력과 강력한 카스티아로부터 험난한 독립투쟁과정의 연속이었듯이
포르투갈인들이 확장할수 있는 방향은 서쪽의 망망대해인 대서양뿐이었다.
“항해왕 엔리케”라고 알려진 엔리케 비제우 왕자는 직접 배를타고 아프리카로 탐험을 나서진 않았지만 탐험대를 후원하며 항해학교와 지도제작소를 설립하고, 탐험가들은 이에 마데이라제도(축구선수 호날두의고향)과 아조레스제도 그리고 1446년에는 베르테곳까지 도달하는데 성공했다.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1488년 아굴라스곳(희망봉)을 발견했으며
바스코 다 가마는 3차례에 걸친 항해 끝에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했다.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로 가는 항로 발견은 포르투갈에게 막대한 부를 안겼는데, 유럽에서 향신료를 구할방법은 베네치아 상인을 통해 구입하는 방법분이었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동양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는데 기존 무역은 베네치아상인들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이집트를 점령한 터키인들에게 막대한 돈을 주고 무역권리를 샀으며 향신료도 인도에서 구자라트, 오만, 시리아와 이집트의 중간 상인들을 거쳐 고가에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팔렸다.
하지만 포르투갈 상인들의 인도 항로 발견은 베네치아가 가지고있던 무역체제를 붕괴시켰으며, 유럽인들은 베네치아에서 구입하던 가격보다 더 싼가격에 많은 향신료를 구할수 있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법.
마젤란 탐험대가 5척의 배중 1척인 빅토리아호만이 유럽에 도착했지만 탐험비용은 물론 왕과 선원들 모두 막대한 돈을 벌었던 것처럼 인도로 가는 향료무역은 위험하지만 수익있는 사업이었다.
포르투갈인들은 생각했다. 만약 인도로 가는배 5척 모두가 무사히 포르투갈로 돌아온다면? 그야말로 대박이 터질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5척 모두가 무사히 포르투갈로 돌아올수 있을까..
해안가나 섬에 보급기지를 세운다면 오렌 항해를 마친 상선에 물자를 보급할수도 있고 선원 보충, 선박수리는 물론 폭풍우가 올때는 피난처가 될수도 있으며 해적이나 적대적인 세력을 만날시에는 방어를 할수있으며 인도에서 사온 향신료를 저장하는 창고 역활도 할수 있었다.
무인도인 카보베르테와 상투메 프린시페와 페르난도섬 해안가에 가까운 루안다나 소팔라 코친 켈리컷 고아 말라카 마카오등이 포르투갈의 보급기지가 되었다.
하지만 브라질의 상황은 달랐다.
아시아나 아프리카 포르투갈 식민지가 인도나 동남아시아의 향신료 무역 중심과 강력한 현지세력이 존재해 해안가나 섬위주의 거점지배라면 브라질의 경우는 강력한 현지세력이 없어서 손쉽게 내륙으로 진출할수 있었기에 노예를 이용한 플렌테이션을 손쉽게 적용할수 있었다.
또한 강력한 현지 세력이 없다는건 치안안정>군사비절약>산업을 육성>이민자 증가라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포르투갈의 식민지 정책 “동화정책”
포르투갈의 세계적인 축구선수 “크리스티안 호날두”를 보면 이런 의문이 들것이다. 백인인데 피부가 왜 저리 까무잡잡해? 바로 호날두의 증조할머니가 카보베르테 출신 흑인이기때문이다.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의 선두주자로 전세계에 거점을 만들었지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없었다.
표에는 없지만 포르투갈인구는 16세기 100만명정도였다.
네델란드 동인도회사에 소속된 17~18세기 선원수가 250만명 정도로 이중 100만명이 항해중 죽었다고 한다. 포르투갈 역시 많은 사람들이 항해중 죽었으며 특히 남자들의 수가 부족했다.
포트투갈의 파두는 배를타고 나간 남자를 그리워하는 여자들이 남자들을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라고한다.
남자들이 부족하니 여자들은 노예로 잡아온 흑인들과 결혼했으며, 남자들도 아프리카나 아시아에 사는 현지인과 결혼하는데 거리낌없었다.
말레이사아에 사는 말라카 포르투갈인들
미얀마에사는 포르투갈 후손인 버인기족
인도네시아 아체주에사는 람노족
포르투갈인들은 적극적인 혼혈정책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지금도 포르투갈인들의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본국으로도 많이 건너 산다고한다. 이들 혼혈인들에게도 군대와 공직을 개방했는데 영국이나 스페인같은 국가가
혼혈인들은 물론 식민지로 건너간 백인들까지도 차별대우한것에 비하면 비교되는 포르투갈의 정책중 하나라고 본다.
●아프리카 마지막 백인의 보루
1934년 포르투갈 지도
1960년 17개 국가가 독립하여 아프리카의 해라고 불릴만큼 20세기 중반은 아프리카 민족주의로 가득차있었다.
프랑스, 영국 , 벨기에 등은 차례로 아프리카 국가들을 독립시켯지만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국가를 독립 시키지 않았다.
식민지는 1951년 이후 공식적으로는 해외주로 취급되었으나, 실상은 이전과 거의 변함없는 통치가 지속되었으며 1950년대 중반부터 활발해진 식민지 원주민의 독립운동은 점차 격화되었고, 60년대에 들어선 무장 게릴라가 출현하기에 이르렀는데, 주로 공산주의 계열이 주도하고 있었다.
냉전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아프리카 최후의 식민지 제국 포르투갈에게 소련과 아프리카 국가들은 포르투갈 식민지인 모잠비크, 앙골라, 카보베르테, 기니비사우의 독립 운동을 지원했다.
포르투갈은 나토 회원국이었으나, 나토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서유럽을 방어하는 것인 만큼, 아프리카 전쟁에 서방제국을 개입시킨다는 포르투갈 독재자 살라자르의(해리포터?)구상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나토의 영향을받은 군부와 살라자르 독재정권 사이의 단절은 점차 심화되었는데, 61년의 쿠데타가 발생하엿으며, 식민지에서의 분쟁에 대처하기 위해 별도의 독립된 사령부가 설치되었지만, 군부와 정권 사이의 거리감만 생길뿐이었다.
경제학 교수 출신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군대의 추천을 받아 나중에는 군인들까지 통수쳐 권렵을 잡은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는 경제는 발전했지만 식민지 전쟁으로 경제발전 성과를 날려버리고 포르투갈을 지금까지 유럽의 빈국으로 만든 장본인중하나.
살라자르는 다민족의 융합 명목으로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강조하였다. 당시 포르투갈령 아프리카 식민지에서는 교육을 받은 현지 원주민이 군대나 행정부 교육기관위생기관 및 민간기업에서 비교적 고위직에 임명되는 것이 허용되고 있었다. 또한 식민시대 초기부터 포르투갈인과 현지인의 통혼은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었으며, 포르투갈인 뿐만 아니라 원주민에게도 초등~중등교육 ・기술교육의 기회가 보장되었다.
또한 흑백차별이 심각하던 1960년대에 축구선수 에우제비오를 포함한 다수의 아프리카인이 융화정책에 의해 활약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포르투갈계 백인과 혼혈인이 사회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였으며, 식민지 개발에 따른 이익은 현지 원주민들에게 거의 배분되지 않았다.
포르투갈인은 현지인에 비해 경제적으로 보다 여유를 누렸고, 교육기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50년대 중반 이후, 반제국주의 소련의 지원을 받은공산주의는 현지인들의 불만을 자극하면서 세력을 확대시켜갔다.
1961년 2월, 콩고에 거점을 둔 게릴라가 국경을 넘어 앙골라 북부에 침공, 형무소를 습격하여 경찰관 7명을 살해한데 이어 3월 15일엔 백인 1천명 흑인 6천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포르투갈 당국은 즉시 보복을 결의했으며, 이로써 13년에 걸친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이 시작되었다.
살라자르는 해외영토를 사수한다는 결의하에 육군장관직을 겸임했으며, 대규모 증원부대를 아프리카에 파견하였다.
모든 성인남성은 3년간의 병역 의무를 지게 되었으며, 대부분이 식민지에서 싸울 수 있도록 소집령이 내려지는 등, 군국화 현상이 농후해져갔다.
포르투갈은 다른 열강에 비해 보다 오랫동안 아프리카에 군림해왔기 때문에, 현지에 강력한 기반을 구축해 놓고 있었다.
게릴라와의 전투는 시종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포르투갈군은 “군인 뿐만 아니라 민간인도 함께 싸운다”는 전략에 따라 지방 농민을 회유하는데 성공했으며, 동맹국인 남아공의 지원도 가능했던 덕에, 순조로운 토벌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70년대초가 되면 포르투갈의 군사적 능력은 한계에 이르렀지만, 정작 앙골라에서의 전황은 사실상 승리가 거의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쟁 후기로 갈수록 군사적 위협이 줄어들어 앙골라에의 이민이 증가하고 있었다.
기니에서는 총력전에 가까운 양상으로, 전황이 매우 급박하게 돌아갔다.
1972년을 기점으로 미국 등, 서방제국은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영구지배를 사실상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74년초, 게릴라는 대부분 산간벽지로 밀려났고, 앙골라의 모든 도시와 대부분의 농촌을 장악한 포르투갈군이 인종을 불문하고 주민들을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 있었다.
평온한 상황을 유지한 앙골라와는 달리, 기니비사우에서는 동구권의 지원을 받은 게릴라가 전세를 역전시켰다.
1973년까지 포르투갈은 기니비사우를 제외한 나머지 식민지를 대부분 평정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장기간 지속된 식민지 전쟁으로 국가경제는 거의 파산 직전이었고, 국민들 사이에선 염전사상이 팽배해 있었다. 기니에서 활약한 스피놀라 장군을 중심으로 소장파 장교들이 거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카네이션 혁명
스피놀라 장군을 비롯한 소장파 장교들은 1974년 4월 25일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카네이션 혁명”이란 이름은 혁명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을 지지한다는 의미로 거리의 병사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준 데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그 군인들은 총구에 카네이션을 꽂음으로써 화답한다.
포르투갈 독재정권은 붕괴되었으며 민간정부에 민정이양까지 성공한다.
쿠데타의 주역인 “스피놀라 장군”은 아프리카 식민지를 독립시켰으며 식민전쟁을 부당한전쟁이라고 정의하고 자유는 시민들의 권리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포르투갈 정부의 이러한 변화는 아프리카의 상당히 어리둥절했는데 아프리카에서의 전쟁은 포르투갈의 우세로 사실상 끝난거나 다름없기때문이다.
포르투갈 식민지 당시의 앙골라
당시 앙골라와 모잠비크에는 100만명의 포르투갈인들이 거주하고있었으며 지금도 이들의 후손이 남아있다고한다.
앙골라 국가대표팀
하지만 모두가 순순히 남아있는건 아니며 모잠비크에서는 포트루갈의 백인 후손들이 흑인 정부에 반란을 일으켜 모잠비크 내전이 발생하기도 했다.
모잠비크의 역사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11세기 아랍인들이 500년간 모잠비크를 점령하여 금과 상아무역을 하며 원주민을 노예로 착취하였고 1498년 포르투갈 항해가인 바스코다가마가 모잠비크에 상륙한 이래, 1975년까지 500여년간 모잠비크를 식민지배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