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역사나 여러매체에서 이야기 할때 명성황후(민비)에 대해서 일제에 저항하다 안타깝게도 일본 자객에 죽어나간 조선의 국모라고 말하거나, 민비와 관련된 여러가지 이야기는 긍정적으로 말한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잘못된 거였으며 명성황후(민비)가 얼마나 악날한 사람이었는가 조명하고자 한다. 아래는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명성황후에 대해서 가져와봤다.
*민비는 일본이 비하할려고 만든 단어가 아닌 ‘민씨성을 가진 황(왕)후’라는 의미이며 써도 무방하다. 그리고 애초에 이런 사람을 높인들 무엇이 달라지는가?
고종이 명성황후라고 추존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세종대왕을 추존대로하면 장익대왕이다. 대원군 역시 대원왕으로 추존됬다. 이거는 왜 추존대로 안하는지 물어봐라
아니면 광개토대왕을 정식칭호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로 왜 안부르는지도 말이다.
뭐 위의 짤을 보고 국뽕이 차오를지 모르겠는데
명성황후는 미화된 인물일 뿐 행적을 보면 쓰레기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외교관, 작가,정치가·개화 사상가·계몽운동가 유길준
명성황후는 잉글랜드의 메리 1세 여왕,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보다도 더 악하다.
– 유길준
민비는 대원군이 10년간 쌓은 국부를 순식간에 탕진한 여자
– 황현 <매천야록> –
민비의 사치, 낭비 목록을 보자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유행하는 마차는 복잡한 경로로 거금을 주고 수입한다.
현재 고종 어차박물관에 소장
민비의 응접실에 깔린 양탄자, 표범 48마리 분량의 가죽이 들어갔다.
릴리어스 언더우드 여사는 자신의 저서 조선견문록에
민비로부터 축의금으로 100만냥을 받았다고 이야기 했다.
*1년 국가예산은 480만냥
그것 말고도 민비는 굿을 하는 것을 좋아해서 매주마다 궁궐에서 굿판을 벌였는데
시세보다 5배 이상 처주었다고 한다.
무당들은 민비에게 굿판을 더 부추기고 민비는 굿판을 더 벌리고 반복한다.
알렌일기 1895년 1월 27일에 나온다.
민영익을 치료해준 알렌이 누구인지 한번 보자
1884년 3월 27일 알렌은 궁궐로 들어가 고종 부부를 치료했다. 부부는 천연두 증세를 앓고 있었다.
한 달 뒤 왕비로부터 하사품이 왔다. 100야드짜리 비단 한 필과 황금빛 비단 두루마기 하나였다.
*100야드는 90미터가 넘는다.
알렌은 곧 왕실 주치의 겸 고종 정치고문이 됐다.
1887년에는 정2품 참찬 벼슬을 받고 조선 사신들과 함께 미국을 다녀왔다.
그러면 이 알렌은 뭘했냐고? 조선의 금광을 팔아치워서 돈을 번다.
1885년 민영익은 알렌에게 광산 이권에 대해 언질을 줬다.
못배운 할아버지는 민비는 잘못이 없다. 민익영이 다 해처먹었다! 라고 하는데 설상 그렇게 따져서 민영익이 모든것을 해먹었다면 그 현명한 민비는 뭐하고 있었데요……? 외국 군대를 자국 농민과 군인을 진압하기 위해 끌어들인거는 현명한거 맞죠??
(알렌문서 MF 365, 이배용, ‘한국근대광업침탈사연구’ 재인용)
1895년 운산금광채굴권, 1896년 경인철도부설권을 직접 획득해 미국인 사업가들에게 넘겼고, ‘노다지(no-touch)’라는 말을 만들어낸 운산금광채굴권은 40년간 총 900만 톤의 금광석을 채굴해 5600만 달러의 수익을 미국에 건네줬다. 또한 아관파천을 주선해 친미세력이 대거 등용된 뒤에는 경인철도부설권을 따냈는데 두달 만에 일본에 넘기면서 약 200만 원의 차익을 챙겼다.
친미파 세력들이 결집력을 상실하자 미국의 이권에 호의적이었던 친일파 세력들을 간접적으로 후원했고, 일본의 조선지배가 확실시 되었을 때에는 일본에 친미파 인사들의 명단을 넘겨주었고 이들에게 일본에 협력을 권고하였 다는 점을 자부했다고 알려졌다.
-강연석 (1999년 9월 15일). “앨런은 순수 의료 선교사가 아니었다”. 오마이뉴스. 2011년 8월 12일
유학자 황현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국고를 탕진했다는 점을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이는 황현 자신의 저서 매천야록의 곳곳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원자가 태어나자 궁중에서는 원자가 잘 되길 빈다는 핑계로 제사를 8도 강산에 두루 돌아다니며 지냈다. 이렇게 탕진하는 하루 비용이 천금이나 되어 내수사가 소장한 것으로는 비용 지출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호조나 선혜청에서 소장한 공금을 빌려서 사용했지만 그것이 위반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1년이 안되는 기간 동안 대원군이 비축해 놓은 재물을 모두 탕진했다. 그래서 매관(관직을팜)이나 매과(과거시험 합격증을 팜)까지 기승을 부렸다고 한다.
민비는 국가 재정을 탕진한 것 뿐만이 아니라 국내 문제 해결을 위해서 외세를 한반도로 끌어들인다.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을 축출한 뒤 황후는 민씨 일족을 대거 등용하여 조정에 진출시켰다.
이 중 민겸호는 선혜청에 있으면서 군인들의 급료를 착복하고 모래를 섞어서 주자 군인들이 들고 일어나는데
이를 임오군란이라고 한다.
군인들은 분노를 하며 민비를 죽이기 위해서 궁궐까지 침입해서 민비를 찾아 다녔다.
(이후로 민비는 대내외적으로 얼굴을 내비친적이 없다.)
이 당시 민비는 홍계훈의 도움으로 겨우 도망친 다음 청나라를 불러서 진압을 요청한다.
자국 군대의 진압을 위해서 외국군대를 끌어들인 것이다. 이는 외국 군대가 합법적으로 주둔하게 만든 원인이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들도 민비를 혐오했는데 4대 강령중 첫번째가 한양으로 처들어가서 권세가와 귀족을 죽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민비는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서 또 다시 청나라 군대를 부르고, 이는 청일전쟁의 빌미를 가져다 준다.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들어버린다.
동학군은 외국군대가 들어온다는 소식에 급하게 전주 화약을 체결했는데 결국은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경복궁이 장악되고 궁내부가 설치되면서 민비가 더 이상 정치에 참여 할수 없게 된다.
그러자 민비는 러시아를 끌어들인다.
그리고 러일전쟁 역시 일본이 승리하면서 한반도는 완전히 일본에게 넘어간다.
한 마디로 망했다는거다.
이 여자는 결국 민족에게는 관심이 없고, 그때그때 자기 신변 보호만을 1순위로 삼았으며 궁궐을 굿판으로 삼고 국고를 탕진했다. 민비는 근대국가의 개념도 없었기에 재산을 호주머니에서 쌈짓돈 쓰듯이 낭비했으며, 어느나라와 손을 잡아야 하는지 외교적인 감각이라고는 살펴 볼 수가 없다.
앞에서 인용한 매천야록에 실린 이야기를 좀 더 보자
민비가 임오군란을 피해 도망쳐 강을 건너려 할 때 사공들이 난색을 표하며 말하기를, ” 서울에서 강을 차단하라는 명이 있었다.” 고 하였다. 또한 행색이 이상하여 의심하여 건널 수 없다고하였다. 민비가 금반지를 빼어 가마 밖으로 던져주어 건너게 되었다.
광주 땅에 들어서서 길가에서 휴식을 취할 때, 한 노파가 다가와서 보고 피난하는 부녀로 생각하여 혀를 차며 말하길,
” 중전이 음란해서 이 난리가 일어나서 낭자를 여기까지 피난오게 하였군요.” 하였다. 민비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훗날 민비는 환궁한 뒤 이 노파를 찾았고, 찾지 못하자 마을을 통째로 없애버렸다.
민비는 자신이 쓸 경비가 부족하자 수령직을 팔기로하고 민규호에게 가격을 매겨 올리라고 하였다.
민규호는 백성을 다스리는 관원을 판다는 것은 옳지 않다 생각하고, 그 응하는 자가 없게하려고 일부러 비싼 가격을 매겼다. 예를 들어 관원의 녹봉이 1만꿰미라면 가격은 그 두 배인 2만 꿰미로 정했다
그런데도 응하는 자가 더욱 다투어 몰려들었고, 이렇게 부임한자들은 임지에 도착하여 본전을 뽑기위해 가렴주구를 더욱 일삼아 백성들을 크게 괴롭혔다. 민규호는 비로소 후회하였다
민비는 명산 사찰을 돌아다니면서 기도하였는데 세자의 복을 빌기 위해서였다. 이에 독경하는 소경과 무당들이 각 고을에 횡행하여 이들을 맞이하고 전별하는 일이 이어졌다.
금강산은 흔히 일만이천봉이라 하는데 매 봉우리마다 바치는 귀중한 예물의 갑이 만 꿰미에 이르렀다. 남승이든 여승이든 인연이 되어 그들이 거처하는 절집으로 조금이라도 이름이 있다고하면 원당(소원을 빌기 위해 세운 건물)을 세우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시골사람 가운데 중 떼거리를잘못 건드려 형을 받고 집안을 망친 경우도 많았다
황현 <매천야록>
황현 매천야록을 보면 민비의 무능함과 탐욕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민비는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어떤 일이든 거리끼지 않았으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외국군대를 끌어들여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든 사람이
일본자객에게 죽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미화가 되고 있다.
을미사변에 대해서 덧붙이자면
민비를 죽인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친일대신과 모의한 일본 재각들이 경복궁에 난입해서 민비를 죽인것으로 알려져있는데, 일본자객이 신속하게 민비가 있는 위치, 그리고 민비를 알아보고 시신을 처리하는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과정은 다음과 같다.
조선군 1대대장 우범선(禹範善)·2대대장 이두황(李斗璜)·3대대장 이진호(李軫鎬) 등과, 전 군부협판 이주회(李周會), 국왕 친위대 부위(副尉) 윤석우(尹錫禹), 일본 공사관 통역관 박선(朴銑), 문신 구연수(具然壽) 등이 협력했고, 궁궐수비대의 구식군대 출신 조선인 병사들도 자발적으로 협력했다. 송병준의 사위이기도 했던 구연수는 일본 낭인들이 민비 시신을 소각하는 걸 도왔다.
*우범선은 씨없는 수박으로 알려진 우창준의 아버지
대장부터 말단 병사까지 민비를 죽이는데 자발적으로 협력했다.
그리고 민비가 죽었다는 소식에 백성들은 기뻐했다고.
아무리 일본이라고 해도 수도 한복판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무리일 것인데
유길준의 이야기를 보면 단서가 있다.
유길준은 흥선대원군을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최고 지휘자로 지목했다.
민비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와 비밀 접촉하였고, 1894년 가을 개화당 모두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다가 대원군에게 발각되었으며, 대원군은 일본공사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협의 끝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고 진술하였다.
<문명의 정치사상 : 유길준과 근대한국 93페이지>
조선군 1대대장 우범선은 대원군의 사람이었다.
위의 말을 종합해보면 시해의 범행은 일본 낭인들이 맡고, 외관 상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의 반란으로 꾸민다.
한마디로 조선인이 계획하고 일본의 칼을 빌렸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