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이 글을 쓸때는 민비의 인물에 대해서만 설명한거 였다면 이번에는 조선말기 전반적인 역사 상황을 두고 어떻게 조선이 민비 때문에 망해 갔는가로 보면 된다.
민족주의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사관에서는 구한말에 대해서 자세하게 가르쳐주지 않고 일본만 나쁜놈이야! 하는데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능했다. 고종, 흥선대원권, 민비 어느 누구 할 것없이 근대국가라는 개념이 없어서 국가 재산을 마음대로 유용하였으며, 국가의 존속이 아닌 왕실의 존속을 위해서 어느 나라와 손을 잡아야 할지 모르고 아무에게나 도움을 청하다가 나라를 내어주는 빌미를 가져다 주게 만든다.
그 중에서도 조선을 망하게한 일등공신 민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조선이 망하게된 과정을 알아보자
민씨는 1851년 11월 17일(음력 9월 25일) 경기도 여주시 근동면(近東面) 섬락리(蟾樂里) 사저(현재의 여주시 능현동 250-1)에서 민유중의 6대손으로 사도시 첨정이었던 민치록(閔致祿)의 재취부인 한산 이씨의 딸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자영이었다고한다.
어렸을 떄 사서오경을 공부하고 1858년 아버지 민치록이 죽자 습렴하는 모습을 어른처럼 지켜보아 주위 사람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866년 어린 민자영은 왕비 간택에 참여하게 된다. 민자영이 간택되어 왕비가 되는 과정은 《동치오년병인삼월 가례도감의궤》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우선 1866년 2월 15일(음력 1월 1일) 대왕대비 조씨가 조선에 있는 12세 ~ 17세 사이의 모든 처녀들에게 금혼령을 내린다.
그리고 음력 2월 25일 초간택을 행하였고, 김우근의 딸, 조면호의 딸, 서상조의 딸, 유초환의 딸 등과 더불어 재간택에 들어갔다. 왕비로 정해진 때는 3월 6일의 삼간택에 뽑힐 때였으며, 3월 21일 남편이 될 고종이 운현궁에서 명성황후를 데리고 창덕궁으로 돌아오는 친영을 거행했다.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의해 축출되고 남편인 고종이 친정에 나서자, 남편을 돕기 위해 그녀는 여흥 민씨 친척들을 모아 정치 세력화한다.
그런데 믿는 구석이 생긴 두 부부는 흥선대원군의 말을 듣지 않고 바로 뒤통수를 후리는데
흥선대원군을 정계에서 축출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일리가 있었다. 원래 왕실에서 왕이 될 아이를 입양할 때는 아버지가 없는 먼 친척 아이를 데려오지만 고종은 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에겐 정치적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흥선대원군이 중국으로 끌려가기 전까지 어떤일이 있었던걸까.
원래 19세기 중반까지 조선은 안동 김씨가 세도 정치를 하면서 중앙 요직은 물론 지방직도 싹쓸이를 하는 시점이었다.
몇 대에 걸쳐 왕가와 혼맥을 맺고 왕권을 약화시키고 국정을 마음대로 개판친것은 역사를 조금이라도 관심있게 보았다면 알것이다.
그래도 여흥 민씨는 경주 이씨, 반남 박씨나 양주 조씨, 풍양 조씨, 안동 권씨, 달성 서씨 등과 함께 조정 내에 일정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나름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흥선대원군은 조대비의 풍양 조씨, 안동 김씨를 밀어내기 위해 척화파를 이용하고 안간힘을 썼고 딱 10년 동안 화폐도 주조하고 경복궁을 중건하고, 두 차례 양요를 막아내는 동시에 서원을 철폐하는 개혁을 이뤘다.
그러나 척화파들이 정권을 잡아 근대화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되어 민비는 남편 고종을 뒷받침할 세력으로 여흥 민씨들을 이때 요직에 대거 추천한다.
고종은 민비를 믿고 이들을 중용하기 시작한다.
여흥 민씨들은 권력을 공고화하기 위해 온 혈연 학연을 동원해 각 요직과 지방직을 휩쓴다.
안동 김씨의 세도를 그대로 가져가려 했으며 매관매직을 통해 파벌의 덩치를 순식간에 불리면서 가장 큰 세력이 되었다.
그러다 1876년 강화도 사건이 일어났고 일본의 국서 문제로 개항을 하느냐 마느냐 싸움이 벌어졌다.
일본의 국서에는 그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천황(天皇)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였고 그 당시 황제는 중국만이 쓸 수 있었기에 대단한 어그로를 끌게된다.
규수 등 개화파들이 개항을 주장한 데 반해 여흥 민씨들은 아직 별다른 의견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축출된 대원군이 ‘척화’라는 기치를 들고 반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일관성 하나는 인정해줘야 한다.
그러다보니 고종 부부는 개화파의 손을 들었다. 곧 일본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은 개항된다.
어이없게도 이게 사실이다.
삼정(세금 수취)의 문란은 민씨들이 집권해도 변한 것이 없었는데 외국 문물까지 밀려들면서 글읽는 선비나 백성들의 불만은 고조되기 시작하면서 곧 헬게이트가 오픈하는데
고종은 왕권의 강화와 국방을 위해 서구식 군대를 창설할 필요를 느꼈다. 원래 있던 오군영에서 80명을 차출해 별기군을 새로 창설하고 기관포를 수입해 배치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는게 아니라 국방비를 증액한 게 아니기 때문에 오군영 운영비를 충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인데?)
그러나 심지어 국방비를 증액은 커녕 때어먹기에 바빴다. 조총 140,000자루 중, 30,000자루 처분, 군영을 장악한 민씨 척족 세력이 팔아서 재산으로 축적했다.
조총과 각종 연환의 탄환 7,849,310발 중 3백만 발을 처분해 화폐로 만들어 사용했다. 시중에 갑작스럽게 화폐가 많아지면 어떻게 된다? 인플레이션으로 물가 폭등을 불러온다.
서양 선박을 막기 위해 대원군이 만든 해상 기뢰인 수뢰포 제작 시설을 해산하고 연구원의 녹봉을 착복했다. 그리고 신기전, 호준포, 삼안총 등 29종의 화기 및 화포 총 11,304문 중 5,195문을 팔아 그 이득을 ‘사유화’했다.
게다가 화약 무기의 주원료인 염초와 유황, 각종 목탄까지 총 284,102근 중 84,192근을 외국에 팔았고, 문제는 이거 역시 민씨 척족 세력들이 ‘사유화’했다.
대원군은 ‘심도포량미’라는 쌀을 징수해 강화도 군비에 투자했는데, 이 민비년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저장된 군량미 288,949석 중 15만 석을 아예 ‘빼돌렸다’.
결국 1882년 견디다 못한 오군영이 임오군란을 일으킨다. 이들은 역적이 되지 않기 위해 흥선대원군을 추대했고, 그는 장남 이재면과 부인을 대동해 입궁했다.
이들은 제일 먼저 별기군을 창설한 민겸호와 김보현을 주살하고 왕비를 죽이려 했다. 왕비는 궁녀로 변장해 무예별감 홍재희의 등에 업혀 충주까지 런해버린다. 얼마나 빨리 튀었는지 군인들이 당황할 정도
민비가 충주로 피난을 간 당시, 임오군란을 일으킨 병사들은 중전과 책임자들을 도륙하기 전엔 해산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흥선대원군은 빨리 국정을 안정시키려면 일단 이들을 해산시켜야 했다. 중전이 난리 중에 죽었다고 선언하고 국모로서 국장을 선포하고 병사들을 해산시킨다. 진짜로 나라가 개판이었다. 그래서 민비는 장례를 2번 치르게 된다.
한편 구사일생으로 살은 중전과 측근들은 밀사 윤태준을 고종에게 보내 자신들의 생존을 알린다. 이들은 당장 뺵도 없으니 청나라에 도움을 청한다.
당장에 압록강을 건넌 청나라 군대는 왕십리 근처에 모여있던 오군영 병사들을 순식간에 도륙하고 서울을 장악했다. 민씨들은 조정으로 바로 복귀하고 대원군은 만주로 끌려간다.
위기는 곧 기회. 민씨들은 완전히 조정을 장악하고 개화파들에게도 약간 자리를 허락한다. 이들은 청나라 식의 근대화인 양무운동 모델을 따라 국정을 개조하기 시작한다. 조선의 근대화를 책임지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게된 것이다.
그러나 민비의 레전드가 이제부터 시작될지는 그 누구도 몰랐다.
민씨들의 매관매직과 부정부패는 날이 갈수록 심화됐었다. 근대화를 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이들은 양반 과세나 국가 전매 제도 등에 대해 반대하고 마음대로 했다.
한마디로 양반 계층에 대한 세금도 걷지않고 담배에 대한 세금도 안 걷겠다는 거였다.
서구 각국에 귀족이 없어서 신분제를 없앤 게 아니라, 국가 총력전의 양상으로 가는 산업 혁명 이후의 전쟁 때문에 신분제를 없앤건데 민비를 비롯한 민씨 일당은 신분제를 철폐할 의지도 견식도 아무것도 없었다.
청나라도 가만있지 않았다. 한반도의 이권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조선 조정에 대해 영향력을 높이려는 방안으로 군사 고문과 재정 고문을 파견했다.
그러고는 청나라의 관리들은 조선을 엄청나게 수탈해간다. 원새개는 5년간 조선에 머물렀는데 조선 재정을 박살냈으며, 조선 내 간호사들을 자기 여자로 데려가기도 하였다.
민씨 정부가 ‘친청 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민씨 척족 세력은 청나라 사신과 수행원에게 은과 각종 화폐 3백만 냥을 쥐어 주었고, 이는 철종 때 조선 국가 예산 3년치 예산이며, 대원군 기준으로 국고의 1/3 정도의 예산이었다.
이 때 내한한 묄렌도르프가 새로운 화폐 주조 안건을 고종에게 올렸다. 일본에서 공부한 개화당은 반대를 하고 길길이 뛰었다. 이미 흥선대원군 때 당백전으로 물가가 급등하는 등 부작용을 이미 경험했음은 물론, 안그래도 외채가 많은데 돈 가치가 떨어지면 큰일난다는 거였다.
그래서 개화당은 양반들에게서 세금을 걷고 담배, 전매제 같은 서양에서 세금을 수취하는 방식처럼 조세를 근대화 하려고 했다.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었지만 정부는 이 말을 듣지 않았고 세금을 더 걷지 못하는 조정으로서는 새 화폐 주조에 대한 유혹을 떨치지 못했다. 민씨 일당은 그냥 밀어붙였다.
그리고 결과는 망
개화파는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들은 청나라 식이 아니라 아예 일본식으로 한 번에 서구화를 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일본의 근대화는 30년이 지나고 있었다. 서재필 등을 일본 군사학교에 보내 군제 개혁의 밑그림을 그렸다.
개화당이자 고종의 매형인 박영효는 사비를 탈탈 털어 군자금을 댈 정도였다. 프랑스, 영국, 독일, 일본의 제도를 연구하고 조선에 도입하기 위해 고종을 닥달했다.
그 때마다 민비년이 심어놓은 여흥 민씨 정권은 이들의 발목을 잡았다. 개화파가 고종을 설득해 뭔가 해볼려고 하면 어디서 뭘 듣고 와서 반대만 했다.
심지어 화폐 개혁이 실패하고 난리가 난 것을 개화당 탓으로 돌렸다. 한 번은 일본에서 무상 차관을 준다고 그래서 김옥균이 일본에 갔는데 민씨 일당은 뒤에서 고종을 협박하고, 일본 영사관에 사람을 보내 ‘차관 줘봤자 김옥균이 비자금을 만들 뿐이다’라면서 재를 뿌렸다. 결국 김옥균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개화당은 안되겠다 싶었다. 김옥균은 관직을 모두 사퇴하는 척하면서 뒤에서 칼을 갈기 시작한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난다. 김옥균과 급진개화파들은 고종과 중전을 납치하고 민씨 일당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주살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청나라 군이었다. 이들을 막기 위해 이미 일본군의 힘을 빌리기로 일본 영사관과 얘기가 끝난 상태였다. 그러나 일본은 청나라의 적극적인 기세에 놀라 후퇴를 하고 충돌을 피하기로 한다. 청나라 군이 압록강을 건넜는데 일본군은 꼼짝하지 않았다. 결국 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났다.
개화당은 대부분 인천에 정박했던 일본 국적선 치토세마루 호에 올라 도망가고 조선에 남은 잔당과 가족들은 몰살됐다. 이제 일본식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그래도 민씨당 세상이었는데 이제 조정은 민씨 일파 일색이 됐다. 청나라와 일본은 양국 군대의 한반도로부터 철수에 합의하고 한반도에는 힘의 균형이 불안하게나마 이뤄지게 된다.
그래서 민씨들이 주도하는 근대화가 시작된다. 전신이 설치되고 호텔도 문을 열었다. 교육도 재정비하기 시작한다.
교과서에서는 이를 두고 민비가 근대화를 했다라고 주장하는데 막상 뜯어보면
신분제, 양반 면세 제도 등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조선의 서구 근대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아울러 갑신정변도 있어, 과감한 정책 제안이나 시도는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민씨 일당은 한반도에 돈 될만한 건 죄다 외국에 헐값으로 넘기면서 중간에서 착복했다.
근대화에 써야될 돈을 민씨 세력이 사유화함으로써 부의 분배도 악화되고 자원이 마구 반출돼 나라 경제는 휘청이고 있었다. 그동안 ‘영약삼단’ 등 청나라의 간섭은 날로 심해졌고, 일본이 갑신정변 주모자들을 숨겨주고 있는 것도 끊임없이 외교 마찰을 일으켰다.
이후 동학운동 떄문에 청나라와 일본이 또다시 출병하게 되고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1895년 일본이 이겼다.
청나라는 요동반도와 타이완 섬을 일본에 할양하고 배상금을 지불했다.
중국 북양함대의 제독 정원은 음독자살했다. 일본은 보호 중이던 개화파들을 조선에 복귀시켜버렸다. 중전과 수구당은 말한마디 못하고 ‘역적’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미국에 있다가 귀국한 서재필은 고종한테 얼마나 당한게 많은지 아예 고종 앞에 뻣뻣하게 서서 자기를 미국 시민 제이손이라 소개하곤 담배를 뻑뻑 피운다.
이들은 일본을 등에 업고 개혁 조항등을 준비해 돌아왔다. 그리고 조선의 복식과 문화를 서구식으로 변모시키기 위한 개혁, 갑오개혁을 시작한다. 고려 시대부터 존속돼 온 과거제도도 이 때 사라진다.
그러나 민씨 일당이 축출된 것은 아니었다. 주요 요직에도 그대로 있었다.
민비는 또다시 청나라처럼 러시아에 의탁하여 조선을 지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1895년 음력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 조선의 국모 민씨는 사망했다.
이후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갑오개혁에 실패하고 밀려나있던 개화파들을 앞세워 다시금 정국을 장악하려 한다.
이에 고종과 민씨 척족은 춘생문 사건 및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제국에 몸을 의탁한다. 러시아는 즉각적이고 매우 강경하게 일본을 겁박한다.
위세에 눌린 일본은 물러서고 결국 잠깐 들어섰던 친일 내각은 일소된다. 고종의 매제인 박영효 역시 다시 역적 처지로 일본으로 간다.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직전까지 한반도는 그야말로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어버린다.
민씨 친족들은 긴급히 프랑스 공사관, 러시아 제국 공사관의 협조를 구해 독립을 선포하고 대한제국을 만든다.
명성황후를 잃었지만 어떻게든 황실을 지키기 위해 움직였다. 독립협회를 창건해 백성들에게 독립의 당위성과 황제가 된 고종에게 충성하라고 계몽했다. 조선의 계몽 군주를 꿈꾸던 고종은 중추원을 설치해 서구의 귀족원 내지 상원 의회를 만들 준비를 한다.
독립협회는 근대화를위해서 입헌군주정, 의회정치를 주장하지만
고종이 독립협회가 점차 자신을 넘본다고 판단해 황국협회라는 친위단체를 만들어 독립협회를 박살내버린다.
그후에는 이용가치가 떨어졌다고 판단했는지 황국협회도 해산시킨다.
이때 독립협회가 박살날 시기 훗날 대통령이 될 이승만도 고종 퇴위 음모라는 명목으로 잡혀갔다. 이승만은 독립 정신이라는 책을 발간하고 사람들에게 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다녔지만 이것이 고종이 보기에 왕권의 위협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이승만은 감옥에서 무자비한 고문을 받게 된다. 안면 한쪽이 일그러지고 이상한 습관이 생기게 되었는데 고문 휴유증 떄문에 그렇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 이후로 이승만은 조선 왕조를 혐오하게 됬으며 후일 광복이후 초대 대통령이 된다음 조선왕족 재산을 전부 몰수하게 된다.
그리고 민씨 척족들은 대한국 국제라고 해서 헌법을 만든다. 서구 헌법을 만든다는 것은 독립을 선언하고 해외 열강들에게 독립을 인정받기 위함이었다.
일본조차 메이지 유신 이후 40년이 다 돼가는 1890년에야 제국 헌법을 반포하고 다른 열강들과의 불평등 조약등을 없앨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한국 국제는 황제에 대한 절대성과 전통적 충성만을 강조한 내용으로 서구의 인권 사상이나 나라의 조직 내지 국민의 의무, 기본권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한반도 곳곳을 조차지 명목으로 강탈하기 시작했고 조선 내 광산들을 그냥 헐값에 가져가기 시작했다. 특히 러시아 국경 주변에는 러시아 군대의 무력 시위로 인해 조용할 날이 없었다.
이렇게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한반도 이권을 싹쓸이하고 내정 간섭을 시작하자 대한제국의 앞날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각국 열강에게서 빌린 외채는 갚을 수 없는 수준으로 늘어만 갔다.
1905년 러일전쟁으로 승전국 일본이 대한제국을 완전히 장악한다. 그러나 주변 열강들은 이전과는 달랐다.
영국과 미국은 오히려 일본의 한국 지배를 묵인하게 되고 이제 조선을 도와줄 열강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친러파였던 민씨 척족은 전향하지 않고 마지막에는 끝까지 고종을 보필했다.
……는거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고 친일로 또다시 돌아선다. 벼슬을 버린 양심 인사들을 제외하고,
벼슬길에 남아있던 거의 모든 민씨 척족 인간들과 그 후손들은 친일파가 된다.
원래 친일이었던 개화파들보다 더 심한 추태와 아부를 보인다. 헤이그 밀사를 보낸 고종에게 양위하라며 윽박을 지르고, 을사조약, 정미조약 등등 차례차례 국권을 일본에 넘기는 데 앞다퉈 충성을 바친다.
단, 민씨 전부가 친일파가 된 건 아니다. 대한제국 육군 부장(중장) 민영환은 명성황후의 13촌 조카뻘로 을사조약과 동시에 목을 찔러 자결했다.
이렇듯 총평을 해보면 민씨 척족들의 부패와 사치, 매관매직의 중심에 민비가 있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보다 더한 세도정치를 외세들이 밀려올때 감행한 것은 조선으로써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결과적으로 동학농민운동과 같은 민란을 제대로 진압하거나 달래지 못한 사태에서 민비와 그 일족 정권이 생각한건 중국에게 반란세력 진압을 명분으로 군사력을 빌린다는 말도 안 되는 일들 뿐이었다. 그러나 중국군을 자국내에 끌여들인 결과는 처참했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오히려 외세를 끌어들여 자국민을 진압하게 한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는 행동이다. 개항에서도 조선을 거의 다 내주다시피 했다.
특히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 이후 보여주는 고종과 민비의 추태는 그야말로 19세기 조선의 참담한 까막눈 현실로, 조선을 멸망으로 이끌게 된다.
청일전쟁 때는 아예 자국 내에서 외국군이 전면전을 수행하는걸 방임했으며 일본군과 청군에 각각 조선 정규군을 파병하여 서로 총질까지 하게 한 원흉이다. 이는 세계사를 찾아봐도 전례가 없다. 그야말로 자기 권력에 미쳤다는 거다.
조선의 현실은 보지 않고 이이제이랍시고 나중에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청일전쟁과 같은 추태의 연속은 그 스스로 명을 재촉한 결과를 낳았다. 자국 영토에서 외국군과의 싸움을 조장하고 방임한 이는 민비가 유일할 정도
외국인들이 민비를 총명하다고 한 일화로 민비를 판단하기에는 힘들다. 민영익을 치료해준 알렌은 사례로 10만 냥을 받았으며, 민비를 호평한 릴리아스 언더우드도 자신의 책 ‘조선견문록’에 민비년이 결혼 축의금을 100만 냥 주었다 말한다. 1895년 조선 정부 세입이 480만 냥 수준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적은 돈이 아니다. 그냥 돈 쓰듯이 지 꼴리는대로 썼다는 거다.
그리고 비숍의 여행기록의 내용도, 당시 일본에 거액의 보상금을 지급하여 백성들은 빈곤에 시달리고 구식군대에 지급할 급여가 없어 쌀과 모래를 섞어 지급하는 만행을 저지르고도 머리 위에 진주와 산호로 만든 장식을 달면서 호사를 누렸다고 한다.
민비는 대체로 서양인들에게 친절했기 때문에 서양인들로부터는 나쁜 평가를 받을 이유가 없었다. 멍청하지 않았다는건 이미 당대의 반대자들조차도 대부분 인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총명하다면서 반박하는 것도 논리가 없다.
이렇듯. 민비는 조선을 완전 멸망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며, 오늘날 민중사학의 미화받는 대표적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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