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틀그라운드로 유명한 크래프톤은 최근 상장을 하면서 엔씨소프트, 넥슨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게임 업체 반열에 올라섰다.
이 자리에 쉽게 오른 것은 아니었다. 크래트폰은 창업 후 10년이 넘는 개고생 끝에 배틀그라운드가 세계 시장에서 한방을 제대로 터뜨리면서 단숨에 거물급 게임 회사가 된 케이스다.
크래프톤은 2007년 블루홀 스튜디오라는 이름으로 처음 설립됐고, 2015년 블루홀, 2018년 지금의 크래프톤으로 사명이 바뀌었다.
창업 당시만 해도 크래프톤을 상징하던 게임은 PC MMORPG인 테라였다.
테라는 네오위즈와 첫눈 창업자인 장병규 크래프톤 의장과 엔씨소프트 출신 프로 제작진들이 의기 투입해 3년간 300억 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개발한다는 이유로 출시 전부터 게임판에서 큰 화제가 된 프로젝트다. 게임을 하지 않는 필자도 테라라는 이름과 테라 앞에 붙은 3년간 300억 원이라는 수식어는 지금도 기억이 날 정도다.
하지만 테라는 관심에 걸맞은 성적표를 받아들지 못했다. 국내에서는 메이저 MMORGP가 되지 못했고 장병규 의장이 총대를 매고 노크했던 해외 사업도 시원찮았다. 믿었던 프로젝트가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회사 자체의 위기로 이어졌다.
크래프톤 성장사를 다룬 책 크래프톤웨이를 보면 멘탈이 꽤 강한 편인 장병규 의장이 번아웃을 고백할 만큼, 회사 사정은 어려웠고 미래는 불투명했다.
2014년 여름. 장병규가 김강석을 회사 밖으로 불러냈다. 편의점에서 맥주 캔을 하나씩 사 들고선 공터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맥주 한 모금 들이켜고 장병규가 입을 열었다. “지쳤어요. 번아웃됐습니다.”
김강석은 웃었다. “농담하지 마세요. 의장님은 절대 번아웃이 없는 사람입니다.” “농담 아니에요. 진짜 번아웃됐어요. “알겠어요. 진지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장병규가 말을 이었다. “대표님은 어떠세요?” “저는 괴로운데요 살만 합니다. 어떡합니까, 가야지.” 장병규는 잠시 침묵한 뒤 속엣말을 꺼냈다. “블루홀을 매각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성공했다고 말은 못하겠지만 재무적으로 투자자들에게 나쁘지 않은 옵션이에요. 대표님이 힘들다고 하면 매각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이제 블루홀이 쓸 카드가 더는 없습니다.”
장병규는 스스로를 하얗게 타버린 재로 여겼다. 무슨 짓을 해봐도 소용 없다는 상실감과 허탈함에 휴식을 모르던 사람이 하루에 몇 번씩 업무를 놓았다. 컴퓨터 화면도, 휴대전화도, 문서도, 아무것도 들여다보기 싫었다. 그의 손안에는 더 이상 쓸 카드가 남아 있지 않았다. 300억 원 상당의 개인 은행 예금을 담보로 잡히면서까지 돈을 쏟아부었는데, 회삿돈이 바싹 말랐다. 테이블을 정리하고 불을 끄고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다.
당시 블루홀 대표이던 김강석은 선뜻 매각에 동의하기는 힘들었다. 그런데도 장병규 의장은 계속 진지한 모드로 나왔다.
김강석이 카드 하나를 떠올렸다. 테라에 이어 새로 준비하는 MMORPG 프로젝트 W였다.
“MMORPG를 만드는 게 블루홀의 일입니다. W는 만들어볼 가치가 있는 게임이에요.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요.” W의 예상 출시 시점은 2017년이었고 그때까지 블루홀이 쓸 패는 없어 보였다.
장병규가 다시 한번 말했다. “팔까요?” 김강석이 말했다. “생각을 해볼게요. 파는 건 좀 아닌 거 같아요. 회사를 팔면 창업자나 초기 멤버 몇 명만 이득을 보는 거잖아요. 저희 구성원 모두가 아니라요.” “무슨 생각이 있는데요?”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말씀드릴게요.”
김강석은 장병규의 고백을 믿지 않았다. 한 달 뒤 장병규는 또 다시 김강석에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번아웃됐다고. 더는 버티지 못하겠다고. 테라의 미국과 중국 진출을 이끌었던 장병규는 더 이상 앞장서서 일할 수 없다고 말했다. 회사의 주요한 성과를 내는 플레이어로서 역할을 내려놓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김강석이 마음을 먹으면 돕겠다고는 했다. 대표이사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손해를 보더라도 회사를 팔자고 했다.
김강석은 장병규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프로젝트 W를 내놓을 때 까지 버틸 수 있는 카드를 고민했다. 결론은 역량 있는 모바일 게임 업체들을 인수해 수익을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주머니 사정에 좋지 않았던 만큼, 김강석은 지분 교환 방식의 인수 전략을 추진하려 했다.
김강석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W를 출시하기 전까지 모바일 게임을 개발하고 출시하면서 회사의 수명을 늘리는 것, 그 방법 말곤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기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대작 게임을 만드는 블루홀 개발진의 DNA는 작고 빠른 개발을 요하는 모바일 게임과 맞지 않았다.
이번엔 김강석이 장병규를 찾았다. “연합군을 쓰는 방법이 있습니다.” 김강석이 말하는 연합 전략은 회사 외부의 개발팀을 블루홀로 흡수합병하는 것이었다. 다른 게임 업체를 인수할 돈이 당장 부족했다. 블루홀이 보유한 주식을 인수 회사 주식과 교환하는 방식을 쓰더라도 다른 게임 업체를 합병하자는 방안을 냈다 죽더라도 마지막 베팅은 해보고 싶었다.
연합군 전략 아래 처음 블루홀에 합류한 회사는 지노게임즈였고, 이후에도 블루홀은 여러 장르 모바일 게임 업체들을 인수했다. 지노게임즈는 이후 블루홀지노게임즈가 됐고 이후 펍지로 사명이 변경됐다.
블루홀 합류 이후 블루홀지노게임즈가 받아든 성적표는 좋지 않았다. 야심 차게 선보인 모바일 MMORPG 데빌리언은 한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렇지만 결국은 블루홀지노게임즈 인수가 크래프톤의 운명을 뒤바꾼 결정적 한방이 됐다.
블루홀지노게임즈 게임 제작을 총괄했고, 지금은 크래프톤 대표인 김창한이 배틀로얄 게임 아이디어를 회사에 제시했고 회사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지금 크래프톤의 상징과도 같은 배틀그라운드 탄생으로 이어졌다.
책을 보면 김창한이 장병규 의장을 포함해 회사를 설득하기 위해 실행력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꽤 인상적이다. 그의 리더십 아래 크래프톤은 배틀그라운드를 이를 또 하나의 한방을 찾아낼 수 있을까? 크래프톤웨이를 읽으니 크래프톤의 행보를 더욱 주목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