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로마는 기원전 8세기경 부터 역사가 시작됨. 우리나라 단군신화처럼 로마에도 건국설화가 있음. 테베레 강에 아이 둘이 버려졌는데 늑대의 젖을 먹고자랐다고함. 그러던 중 다툼으로 한명이 죽게됨. 이때 살아남은 로물루스는 약 3000여 명의 주민으로 로마라는 작은 도시국가를 건설함. 이때가 기원전 753년임.
그리고 기원전 (BC) 272년에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지배하게 됨. 확장력 ㅅㅌㅊ. 그 뒤로 영향력을 넓히려고 여기저기 둘러보는데 지중해를 지배해야 무역권이 강해지지 않겠음? 이탈리아 바로 밑에 위치한 시칠리아 섬을 지배하기로함. 이게 수십년간 로마와 카르타고 군대 100만명이 투입되는 123차 포에니 전쟁의 시작임. 이후 유럽에서 100만명이 투입되는 전쟁은 16세기임.
그런데 문제가 있었음. 당시에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던 카르타고가 로마가 커지는 걸 원하지 않았음. 오늘날 지중해 남부 연안은 거의 다 카르타고 영토였다고 보면됨. 그정도로 부유하고 힘있는 상업도시국가 였음. 그래도 두 나라는 서로 굳이 전쟁을 벌이지 않았음. 오히려 겉으로는 더 친하게 지냄.
당시 시칠리아 섬 상황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넘어가겠음. 당시 시칠리아에 있던 도시국가 중 하나인 시라쿠사에는 이탈리아인으로 구성된 용병대가 있었음. 이 용병대가 떠돌다가 시칠리아 섬의 또다른 도시국가 메시나에 잠시 머물게됨. 메시나 시민들도 용병대가 잘 쉬다갈 수 있게 허락하고 휴식처와 식량도 내어주었다고함. 근데 여기서 용병대가 통수를 침. 한밤중에 메시나 남자들을 다 죽여버리고 점령해버린거임.
이웃나라 시라쿠사는 이 통수꾼들을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끌고가서 용병대를 박살내버림. 이 용병대장이 로마에 같은 라틴인이라는 이유로 도움을 요청함. 하지만 로마는 처음에는 거절했음. 근데 이 용병대가 카르타고에도 지원을 요청한거임. 로마 원로원이 회의를 함. 만약 카르타고가 용병대를 도와서 시라쿠사를 멸망시키면 시칠리아섬은 카르타고가 완전히 장악하게 되는거임. 이렇게 대세가 기울자 용병대를 돕기로 결론이 남. 로마가 참전해서 자신들을 공격할거라고 소문이나자 시라쿠사는 카르타고와 연합을 함.
당시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패권을 장악하는 과정을 거치며 수백년간 지상전에 최적화 되어있었음. 반대로 카르타고는 지중해 연안 영토를 보면 알다시피 해상전에 최적화 되어있었음. 바다에서 싸우면 로마군이 절대적으로 불리했음. 로마는 발상의 전환을 함. 해상에서 백병전을 하는거임. 갈고리를 카르타고 함선에 걸고 끌어당겨서 배에 부교를 연결하고 백병전을 벌임.
육상전에 유리한 로마가 카르타고에게 완승함. 아 여담인데, 저 부교 무게가 엄청나서 배의 무게중심을 잡기가 힘들었다고함. 그래서 태풍이라도 불면 배가 전복됐다고함.
어쨋건 이러한 전술로 로마는 해상전에서 추가 연승을 하고 카르타고는 항복하게됨. 이때가 BC247년. 당연히 시칠리아는 로마꺼. 여기까지가 1차 포에니 전쟁임.
이후 로마는 사군툼이라는 자신들의 동맹국으로 카르타고를 압박함.
이 때 카르타고의 27세 총사령관은 로마에 복수전을 하고싶어함. 때마침 사군툼에서 카르타고 시민과 친카르타고계 인사들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함. 이 겁없는 카르타고 27세 총사령관은 로마의 동맹국이자 속국인 사군툼을 포위해 버림. 이때 로마는 북부에서 전쟁 중이었으므로 이 건방진 카르타고 총사령관에게 서신을 보냄. 무시당함. 그러자 로마는 카르타고 본국에 사절을 보내서 사군툼의 포위를 풀던지, 전쟁을 하던지 선택하라고 함. 여기서 카르타고 총사령관이 답하길 ‘전쟁을 주마’라고 했다고 전해짐. 그리고 로마는 카르타고에 선전포고를 함. 이때가 BC218년임. 그리고 선전포고한지 안되서 사군툼 시민들은 로마를 버리고 카르타고에 동맹을 요청함. 하지만 카르타고 총사령관은 또 인성질 시작함. 대답이 걸작임. “동맹을 받아주겠소. 대신 모든 사군툼 시민들이 옷두벌 제외한 나머지 재산을 넘기시오” 근방에서 가장 부유한 사군툼 시민들은 굴욕을 느끼고 카르타고에 항전을 결정함. 스스로 재산까지 불태워버림. 하지만 카르타고에 짐. 남자는 대부분 죽고 여자와 아이는 노예로 팔려감. 이 카르타고 총사령관이 바로 그 유명한 한니발.
이때 로마군은 로마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 ‘마르세유’에서 카르타고군을 기다림. 하지만 한니발은 상식을 깨고 알프스 산맥을 넘음. 빨간색으로 표시된게 알프스 산맥임.
알프스 산맥을 넘은 이유는 이탈리아에서 전쟁을 할 경우 근처 세력들에게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었음. 그리고 한니발은 전쟁에서 결정적인 한번의 승리로 로마의 동맹국들이 로마에게 등을 돌리기를 바라며 극적인 한방을 위해 이탈리아로 향함.
이게 얼마나 미친짓이었냐면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을때는 초겨울이었음. 이 때문에 당시 한니발 군대 9만8천 명 중 알프스 산맥에서7만2000명이 죽음. 알프스 산맥에 있는 부족들과 자잘한 전투도 치름. 게다가 한니발 부대에는 코끼리도 있었음. 이 코끼리 부대를 움직일때는 병사들이 밧줄로 매서 끌어올리다가 절벽에서 떨어져죽기도 했다고함. (그분 비하 아님…) 어쨋건 당시 마르세유에서 한니발을 기다리던 로마의 집정관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군대 중 대부분을 형에게 위임하여 카르타고를 치게 한뒤 자신은 재빨리 바다를 건너 북이탈리아에 도착함. 이때 스키피오 집정관의 형은 한니발이 남기고 간 카르타고 방어군과 에브로강북부에서 싸워서 크게 이김. 이후 카르타고는 에브로강에서 입지를 상실하고 이후로 다시는 에브로강 북부를 넘지 못함. 밑에는 에브로강 위치
현재는 파비아로 불리는 타키누스에서 드디어 격전이 일어남. 당시 한니발은 보병2만 명 기병 6000명+ 로마에 적대적이던 갈리아 동맹군 1만 총 3만6천명의 군사와 생존한 몇 안되는 코끼리 부대가 있었음. 당시 로마가 전쟁에 동원가능한 군대는 75만명 이었으며 실제 타키누스 전쟁에는 스키피오 집정관이 이끄는 로마군 보병 2만4천 기병 2400 + 로마 동맹국 보병 4만명 동맹국 기병 4400 =로마군총 보병 6만 4천명 기병 6800명으로 로마군이 압도적이었음.
밑에 사진은 타키누스 (현재 파비아) 위치
당시 타키누스에 주둔 중이던 스키피오 집정관은 또 다른 집정관 셈프로니우스가 시칠리아 섬에서 이탈리아북부로 2개 군단을 이끌고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음. 하지만 생각보다 더 일찍 전투가 시작되고 초기에 카르타고의 기병이 로마의 기병을 압도해버리면서 로마의 기병이 후퇴함. 이때 로마 기병의 후퇴속도를 못따라가던 로마 보병들은 몰살당함. 이때 스키피오 집정관이 카르타고 군에 포위당함. 집정관을 구해낸 17세 기사가 있었는데 ‘푸블리우스 코넬리우스 스키피오’라는 기사로 스키피오 집정관의 아들이었음. 나중에 이 아들이 한니발을 크게 격파하게 됨.
2차포에니 전쟁의 1번째 전투인 타키누스 전투에서 로마는 패배함. 그리고 마침내 동료 집정관 셈프로니우스가 북부 이탈리아에 도착함. 두 로마 집정관은 회의를 함. 스키피오는 우선 겨울을 버티고 봄에 전투를 이어가자고함. 하지만 셈프로니우스는 속전속결을 원했음. 셈프로니우스가 평민출신이라 눈에 띄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음. 한니발은 약올리듯 트레비아 강 앞 로마군 진영 7.5km앞에 진지를 구축하고 주변 마을을 약탈하게함. 이로 인해 셈프로니우스의 속전속결이 더 힘을 얻게 됨.
어느 날 한니발의 기병이 로마군을 기습함. 셈프로니우스는 즉시 반격명령을 내렸음. 한니발의 기병이 퇴각하자 셈프로니우스는 때를 놓치지않고 추격함. 로마군은 퇴각중인 카르타고 군을 쫓아 강을 건너지만 강 건너편에는 진영을 갖추고 있던 카르타고 군대가 기다리고 있었음.
로마군과 카르타고 군 모두 진영 양옆에 기병을 배치하고 중앙에 보병을 배치했음. 이때 한니발의 전술이 들어감. 한니발은 중앙에서서 전선에서 직접 군대를 지휘했음. 그리고 전면으로 맞붙자 중앙 보병들을 조금씩 뒤로 후퇴시킴. 이 후퇴속도 조절을 직접하기 위해 한니발 본인이 중앙 전선으로 뛰어들어감.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기병이 우세한 한니발군의 양옆은 앞으로 후퇴중인 한니발 중앙군은 뒤로 빠지기 시작함. ppt설명들어간다.
로마군 기병은 결국 전멸당하고 한니발 기병이 로마 보병을 포위함. 이때부터는 일방적인 학살이 시작됨. 결국 로마군은 후퇴함. 2차포에니 전쟁의 2번째 전투인 트레비아 전투에서 로마군은 셈프로니우스의 2개군단의 지원을 받고도 2만명이 전사하고 진지로 돌아온 로마군 1만 5000명을 제외한 나머지가 포로로 잡힘. 그리고 카르타고군의 손실은 전사자 대부분이 갈리아인이었음. 또한 이 연승 소식을 들은 인근 반로마세력들이 유입되며 한니발군은 5만 명으로 늘어남.
2차포에니 전쟁의 트레비아 전투에서까지 연패를 한 로마는 서둘러서 선거를 통해 새로운 집정관 2명을 임명함. 귀족출신 세르빌리우스와 평민출신 플라미니우스. 그리고 패전한 스키피오 집정관은 전직 집정관으로 1만 명의 로마군과 함께 에스투리아 서쪽 수비를 담당함.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는 아펜니노 산맥 쪽의 통로인 아레티움으로, 세르빌리우스는 아리미움으로 가서 아드리아 해 방면에 주둔함. 밑에는 아펜니노 산맥.
중부 이탈리아로 들어오는 주요길목을 다 차단해 버림. 근데 이 미친 한니발은 아무도 예상못한 아르노강 상류로 들어감. 이제 막 봄이 시작되며 비가 내려서 아르노 강 상류는 배꼽까지 물이차는 늪지대로 변해있었음. 여길 통과하려면 며칠이 걸리는데 물이 배꼽까지차는 곳에서 어떻게 숙영하고 밥을 먹음. 그리고 위생에도 안좋은데. 근데 이 미친놈은 3박4일 동안 진군해서 아르노강 상류를 통과함. 당연히 수비군이 없었으니 뚫림. 근데 이 늪지대를 건너면서 병사 손실은 물론 한니발도 눈병을 얻어 한쪽 눈을 실명함. 플로렌스 (피렌체)까지 진군한 한니발은 플라미니우스 집정관이 2개군단을 이끌고 아레초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됨. 밑에는 플로렌스와 아레초 사진
한니발은 휴식을 취한 병사들에게 약탈하며 남하할것을 명령.
플라미니우스는 동료 집정관인 세르빌리우스에게 2개군단을 끌고 남하해줄 것을 요청함. 함께 협공하자는 생각이었음. 한니발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세르빌리우스가 내려오기전에 플라미니우스를 깨부술 생각이었음. 따라서 더 빨리 진군할 것을 명령함. 그리고 플라미니우스를 도발하기 위해 계속해서 불태우고 약탈했음. 하지만 다혈질이라고 알려진 플라미니우스 집정관은 이 도발을 참아냄. 결국 한니발은 트라시메노 호수에서 매복을 함.
트라시메노 호수의 좁은 길을 좋은 매복조건으로 생각한 거임. 게다가 한니발은 일부러 멀리다 불을 피우고 이미 한참 멀리서 남하하는 것처럼 위장했음.
멀리서 피워진 불을 보며 플라미니우스는 적들이 빠르게 남하 중이라고 생각하며 호수근처에서 야영을 함. 그리고 다음날 아침 호수를 지나는 좁은 호반지대를 건너기 위해 진군을 명령함. 호숫가라서 아침에 안개가 짙었지만 적들을 따라잡기 위해 빠르게 진군했음. 이때 카르타고 군이 서쪽 끝을 차단하며 기습이 시작됨. 플라미니우스의 3만명의 병력 중 2만명이 여기서 살육당함. 안그래도 지형이 불리한데 병력도 한니발에 비해 열세였던 거임. 이 트라시메노 전투에서 집정관 플라미니우스가 전사함. 그리고 뒤에서 스키피오 전 집정관이 보낸 4000명의 별동대도 손쉽게 처치해버림. 이 전투에서 한니발 군대의 피해는 전사자 2500명이었음.
한니발은 이 전투에서 승리한뒤 로마를 지나쳐 로마의 동맹도시들을 공격하는데 당시 카르타고 군 내에서도 왜 로마를 공격해서 승기를 몰아가지 않느냐 라는 의견이 나옴. 이를 큰 실수로 지적하는 사람이 많은데 현대 학자들은 이때 공성무기 부족이 이유일 거라고 추측함. 로마보다 훨씬 작은 사군툼(1편참고)을 공격할때도 10만명의 카르타고군으로 상당한 시간을 지체했음. 그런데 공성무기도 부족한 상황에서 로마를 공격했다가는 시간을 끌게되서 협공을 받게 될거라고 판단했나봄. 위 전투에서 까지 패배한 로마는 로마가 존폐위기일때만 뽑던 독재관을 뽑음.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였는데 그는 유명한 파비우스 전술로 대표되는 지구전을 주장함. 그러나 로마 시민들은 지구전은 겁쟁이 전략이라고 비난함.
한니발은 식량 확보가 불가능한 분지에 진입하게됨. 길 안내인이 카실리눔을 카시눔으로 잘못 알아듣고 그곳으로 인도한 것임. 한니발은 그를 십자가 형에 처하였으나 이미 파비우스는 곧바로 길목을 차단하여 한니발을 궁지에 몰아넣은 상태였음. 그런데 한니발은 한밤중에 그 지역에서 약탈한 3천여 마리의 소의 뿔에 불을 붙여 로마 측 진영에 풀어놓아 마치 카르타고군이 기습하는 것처럼 위장하였고, 이에 속아 넘어간 파비우스는 그 사이 카르타고군 전원이 그 지역을 빠져나가는 것을 구경만함.
결국 파비우스는 로마로 소환되어 독재관지위를 박탈당함. 그리고 집정관으로 ‘아밀리우스 파울루스’와 ‘테렌티우스 바로’가 선출됨. 결전에 앞서 로마군은 보병 8만명과 기병 8000명을 준비하고 한니발 군은 보병 4만명에 기병1만명을 준비함. 그리고 한니발은 칸나이 평원에 진지를 구축함.
그리고 강 왼쪽은 로마군 오른쪽은 한니발의 카르타고 군이 주둔하게됨.
이번에는 중앙군을 앞으로 조금 더 내보내서 로마군의 공격을 자신의 군대 중앙에 집중시키고 그틈에 유리한 기병대를 이용해서 로마 군 양쪽을 섬멸하고 포위하는 작전이었음. 이 전투로 로마는 5만명이 죽고 1만명이 포로로 잡히게 됨. 집정관 파울루스도 죽음. 살아남은 1만명 중에는 19세가 된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전 집정관 아들)도 있었음. 반면 카르타고 군은 대부분 갈리아인들의 사상이었으며 그것도 5500명 사상자 뿐이었음. 칸나에 전투에서 크게 진 뒤 로마는 과거 독재관 파비우스가 주장한 지구전을 받아들임. 카르타고 본토를 공격하는 동시 이탈리아 내부에서는 게릴라 전을 수행하며 한니발의 보급을 차단해버림. 여기서 카르타고 본토를 공격한 전투가 자마 전투임. 그리고 그 자마전투를 이끈 사람이 전 집정관의 아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임.
스키피오가 본토로 쳐들어오자 한니발은 정예병을 끌고 본토로 귀환함.
로마군의 숫자는 보병 2만9천 명 기병은 6500명 카르타고군은 보병 4만1000명에 기병 4000명으로 이번에는 카르타고가 기병보다 보병이 유리했음.
한니발은 중앙에 코끼리 부대를 배치했음. 하지만 로마군은 오히려 나팔소리로 코끼리를 역으로 도망가게하여 카르타고군을 혼란에 빠트림. 이때 로마기병이 카르타고 군의 기병을 제압하고 카르타고 기병들은 후퇴하기 시작함. 한니발은 일부러 로마 군의 기병을 멀리떨어뜨리기 위해 최대한 멀리 후퇴하라고 명령함.
스키피오는 보병이 포위당할것을 우려해서 길게 보병을 늘어뜨림. 시간을 끌면 오히려 스키피오군이 불리했으나 다행이 로마 기병대가 상대 기병대를 격퇴하고 돌아와서 오히려 카르타고 군이 포위당함.
이로인해 한니발도 포위될 뻔하지만 간신히 탈출하고 카르타고는 항복하며 2차 포에니 전쟁에서도 로마가 극적으로 승리하게 됨. 카르타고는 이 전쟁에서 지고 로마에 모든 식민지를 빼았기게 됨. 한니발도 정예군을 잃고 견제세력에게 숙청위기에 처함. 이후 한니발은 여기저기 망명다니다가 자살함. 한편, 지구전을 처음 주장한 파비우스의 집으로 사람들이 축하를 위해 모였지만 명성을 누려보지도 못하고 3개월뒤 파비우스는 사망함. 그리고 한니발을 이긴 스키피오도 그를 견제한 원로원세력들을 피해 시골로 내려가서 살다 생을 마감함. 유언이 “조국이여, 그대는 나의 뼈를 갖지 못할 것이다.”라고함. 카르타고는 계속해서 세력이 축소되던 중에 로마의 사주를 받은 누미디아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군사활동을 감행했으나 이는 기회만 노리던 로마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하는 꼴이 되었고, 결국 카르타고는 제3차 포에니 전쟁으로 멸망함 3차 포에니 전쟁은 이렇다할 영웅도 전략도 없고 그냥 일방적으로 카르타고가 밀려서 딱히 쓸말이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