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조선의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조선의 기록 문화에 몇 번 감탄을 할 때가 있다. 조선의 사가들이 남긴『조선왕조실록』은 그 분량이 방대하여 세계 유네스코에 지정되기도 했으며, 조선사를 전공하는 교수 및 박사, 사학도들에겐 소중한 자산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내가 본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이 내용도『조선왕조실록』을 참고하여 쓰는 것이다. 심심하면 들어가서 한번씩 읽어봐도 좋을 듯함. 재밌는 이야기들 많음.
조선왕조실록 링크 :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아이 다리 절단 사건과 관련한 이 본문의 내용은, 사실 다른 역사 카페에서 다루어진 적이 많다. 나도 네이버 역사 카페에서 폭넓게 활동하고 있는데, 평소 역사에 관심이 있는 얘들은 이 사건을 들어봤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없는 것 같아서, 한번 써보고자 한다. 이 사건은 조선 시대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은 중종 대왕 시대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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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은 어딨느냐? 연산을 잡아라!”
1506년, 수많은 악행과 폭정을 저지른 연산군이 폐위됐다.
이조참판(吏曹參判) 성희안(成希顔)과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박원종(朴元宗)이
군사를 일으켜 연산군을 몰아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왕으로 추대하니,
그가 바로 조선의 11대 군주, 중종(中宗)이다(중종 반정).
조선의 신하들은 모두 기뻐서 뛰며 춤추었고,
진성 대군은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고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해,
문무 백관의 하례를 받고 사면령을 반포했다.
그리고 모두가 함성을 외치니, 드디어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것이리라.
1533년(중종 28) 2월 16일, 한성부(조선 왕조 수도 행정 담당)에서 급한 보고가 올라왔다.
“전하, 용산강 근처 무녀의 집 뒤에서 어린 아이가 다리가 잘려진 채로 발견되었나이다. 그 아이는 죽지 않고 말하기를, ‘저를 업고 가면 내 발을 자른 집을 가르쳐줄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나이다.
저희 한성부가 생각하기에, 아이를 심문하면 때는 늦어버리고 용의자가 도망갈 것이니, 아이와 함께 빠르게 그곳으로 가서 용의자를 체포하는게 옳다고 생각하옵니다.”
한성부의 보고를 접한 중종 대왕은 놀라며 말하기를,
“아이를 치료하지 않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니, 신중히 간호하여 죽지 않게 하고, 속히 포도 대장(조선 시대 수도 치안 담당관)을 불러 용의자들을 체포하게 하라!”
포도 대장은 왕명을 받잡고 즉시 군사를 풀어 의심나는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그리고 한성부에서 자세히 올라온 보고서에 따르면, 사건의 내막은 이러했다.
1533년 2월 무렵, 추위가 한창일 때 용산강 근처 갑사(조선 시대 군사) 김귀성의 집 앞에서 이 아이가 두 발이 잘려진 채로 발견되었고, 이 아이의 이름은 ‘개춘’이었다. 그리고 의금부(조선 시대 사법 기관)에선 아이에게 발이 잘린 이유를 물었는데, 아이가 말하기를 이렇게 대답한 것이었다.
“어떤 사람이 칼로 제 다리를 자르며, ‘죽어라 죽어라’고 하였습니다.”
즉 아이의 진술에 따르면, 이 아이는 어떤 괴한에 의해 칼로 다리가 잘려진 것이었고, 그 괴한이 이 아이를 용산강 근처에 버린 것이었다.
영화 속 조선 시대 갑사(왕의 호위, 수도 및 궁궐 수비, 변방 수비)
그리고 용산강 근처에 살고 있던 갑사(조선 시대 군사) 김귀성이 궁궐 호위를 위해 직장으로 출근하고 있을 때, 두 다리가 잘려진 이 아이를 발견하여 관청에 신고했고, 관청에서는 한성부에 보고하였으며, 한성부가 왕인 중종에게까지 보고했던 것이다.
조사 과정에서, 노비 ‘한덕’이라는 자가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한덕의 진술에 따르면, 한덕이 이해 1월에 그의 주인 집을 왕래하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허리 아래로 동상이 걸린 이 어린 아이가 길에 버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고, 이 아이의 처지가 안쓰러워서 집에 데리고 와 보살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인이 더러운 아이를 데려왔다며 꾸짖어서 길에 도로 내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한덕이 다시 내버린 이 아이를, 이웃 중에 누군가 그 아이를 또 데려갔다가 다시 버렸고, 이렇게 버려진 아이를 또 김 별좌의 종이었던 ‘연수’라는 자가 데리고 갔다고 한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발을 자른 이유는 듣지 못했고, 아직까지 사건의 진상이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중덕’이라는 노비가 오더니, 자신이 이 아이의 생모라는 걸 자처했다. 스스로 이 아이의 생모라고 자청한 중덕이라는 노비가 말하기를,
“이 아이는 옥가이… 입니다. 지난해 9월 29일에 잃어버렸는데, 올해 2월 17일에 발이 잘린 아이를 업고 가더라는 말을 듣고 우리 부부가 쫓아가 보니 과연 옥가이였습니다.”
의금부(조선 시대 사법 기관)의 관원은 다시 한번 아이에게 발이 잘린 이유를 물었는데, 이 아이가 갑자기, 자신에게 죽을 먹이던 ‘한덕’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자신의 발을 잘랐다고 했다. 사건을 보고 받은 중종 대왕도 마음이 편치가 않았는지,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전교했다.
(참고로 이 아이는 노비다.)
“이 아이의 두 발을 잘랐으니, 비록 죽이지 않았어도 상해한 마음은 죽인 것과 같다. 이 아이는 생모라고 자청한 자(중덕)에게 보내도록 허락하라.”
그러나 여기서 석연치 않은 ‘의문점’이 있다.
다음은 승정원(조선 시대 국왕 비서 기관)이 중종에게 올린 의견이다.
“전하, 전하께오서 분명 발이 잘린 그 아이를 생모에게 보내도록 허락한 전교가 있었나이다.
헌데 지금까지 조사한 것에 따르면, 이 아이는 한덕이 거두어 길렀고, 중덕이라는 노비는 스스로 이 아이의 생모라고 자칭하고 있나이다.
두 집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은데도 그 아이의 소재를 알지 못했으니, 지금 어떻게 중덕이 생모라는 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한덕과 중덕을 함께 모두 가두는 것이 어떻습니까?“
승정원의 말도 일리가 있기에, 중종 대왕은 승정원의 의견을 따랐고, 따로 갑사 김귀성으로 하여금 정성껏 아이를 간호하여 죽지 않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사건의 진상은 풀리지 않았고, 점점 미궁 속으로 빠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중종 대왕은, 한덕과 중덕을 아이가 있는 곳에 함께 가게 하여
다시 한번 면밀히 조사를 시도해봤다.
의금부(조선 시대 사법 기관) 관리 : 아이야, 어떤 사람이 네 발을 잘랐느냐?
노비 아이 : (한덕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제 발을 잘랐습니다.
의금부 관리 : 더 진술하고 싶은건 없느냐? 괜찮으니 마음껏 말하거라.
노비 아이 : 제 발을 자를 적에 머리에 털모자를 쓴 자가 옆에 있었습니다.
이 조사 소식의 내용을 모두 들은 중종 대왕이 말하기를,
“그 노비 아이가 무슨 사사로운 감정이 있어서 한덕을 지목했겠는가?
이는 필시 한덕이 자른 것이다!
그리고 아이의 진술에 의하면, 머리에 털모자를 쓴 자가 옆에 있었다고 한다.
이 사람도 속히 소환해 조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중종 대왕은 갑사 김귀성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그 아이를 신중히 간호하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모자라지 않게 할 것이며,
그 아이를 절대로 죽게 하지 말라.
그 아이가 불행히 죽으면, 너는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 전하… 신이 정성껏 아이를 보살펴 모자란 것이 없도록 하겠사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생모라 자칭하는 중덕은 아이를 지난해 9월에 잃었다고 했으며, 한덕은 올해 초에 얻었다가 주인의 꾸짖음으로 다음날에 버렸다고 했다. 그 사이의 기간이 ‘5개월’이고, 중종은 이 ‘5개월의 공백’에 주목했다.
그 ‘5개월 동안’ 당시 아이는 어디에 있었으며, 언제 발이 잘렸는가?
게다가 아이를 데려갔던 사람도 한 명은 아니었기에, 누군가 그 아이를 데려갔을 때 만약 발이 잘렸다면, 아이가 자신의 발이 잘린 걸 모를리가 없을테니, 그 시점을 아는 것이 사건의 핵심이라 판단한 것이다.
이 사건은 조선 조정 전체에까지 알려졌으며, 3정승을 비롯해 조선 시대 재상들도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비록 일개 노비 아이가 다리가 잘린 사건이고, 어떻게 보면 나랏일 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별로 중요치 않은 사건이었지만, 대충 넘어가지 않고 모두들 관심있게 살폈으며, 중종은 이 사건의 해결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이때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 의금부 소속 정2품 관리) 유보와 동의금부사(同義禁府事) 심언경의 보고가 올라왔다.
(의금부 : 조선 시대 사법 기관)
“전하, 저희 의금부의 조사 내용을 아뢰겠나이다.
저희가 한덕을 데리고 아이에게 가서 보이며,
‘누가 네 발을 잘랐는가?’라고 하니, ‘한덕입니다’라고 답하였나이다.
그리고 한덕과 중덕을 같이 앉혀놓고 다시 ‘어느 사람이 네 발을 잘랐는가?’하고 물으니,
또 한덕을 가리켰습니다.
이어 ‘무엇으로 잘랐는가?’하니, ‘칼입니다’하였고,
‘어디에서 잘랐는가?’하니, ‘방 안에서 잘랐습니다’라고 하였으며,
‘언제 잘랐는가?’하니, ‘낮에 잘랐습니다. 두 손을 묶고 솜으로 제 입을 막았습니다.’
라고 하였나이다.”
아이의 증언으로 봤을 때, 한덕이 아이의 다리를 자른 것이 틀림없었고,
그리하여 의금부는 한덕을 추문(꾸짖어 물음, 심문함)할 준비를 다 마치고
중종 대왕에게 추문할 승인을 얻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추가 진술 내용’이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한덕이 이해 1월 무렵에 그 아이를 주인집에 데리고 왔는데,
주인이 더럽다며 꾸짖어서 그 아이를 버렸다고 했다.
그런데 한덕의 추가 진술에 의하면, ‘수은’이라는 사람이 다시 그 아이를 데리고 갔고,
그 뒤에는 ‘손금’이 다시 데리고 갔다고 했다.
여기서 수은과 손금의 진술서는 사건을 더 미궁 속으로 빠지게 했다.
(당시 이 사건을 맡은 조선 왕조 수사관의 입장이 아니었을까?)
수은의 진술서에는, 자신의 노비가 한 아이를 업고 왔는데, 두 발이 동상에 걸렸고 형체 역시 더러워서 자신이 노비에게 그 아이를 버리라고 명했으며,
손금의 진술서에는, 한 아이가 두 발이 동상에 걸려 검게 부어오른 채 울고 있으므로 주인 집에 데리고 왔다고 한다. 그러나 주인이 꾸짖으므로 곧 버렸다고 했으며, 그 뒤 다시 무녀 귀덕이 그 아이를 데리고 갔다고 한다.
???
이들 진술서에 의거하자면, 한덕이 버리고 간 아이를 수은과 손금이 다시 거두었다가 버렸다는 이야긴데,
이 아이가 동상이 심하게 걸리긴 했지만, 이 당시엔 아이에게 분명 두 발이 있었다라는 이야기다.
곧 의금부는 귀덕도 붙잡아 심문했고, 곧 귀덕은 그 아이와 관련해 진술했다.
한 아이가 두 발이 동상에 걸려 있으므로 집으로 데리고 왔는데,
이해 2월 5일에 발 하나가 동상으로 빠졌으며, 2월 8일에는 또 다른 발이 동상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질금’과 ‘을비’라는 자들이 이것을 똑똑히 보았다고 증언했다.
목격자로 주목된 자질금은,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무녀 귀덕이 정말 아이를 데리고 와 살렸는데, 당시엔 두 발이 완전하였지만,
두 발이 빠졌을 때는 보지 못했습니다.“
을비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귀덕이 두 발이 동상에 걸린 아이를 살리려는 것을 보았지만,
발이 빠졌을 때는 보지 못했습니다.“
즉슨, 귀덕의 증언을 일부 동의하면서도 발이 빠진 걸 보지는 못했다고 증언했다.
이렇게 되면 정황상 귀덕이 강력한 용의자가 되는 셈이고, 오히려 한덕은 용의자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문제는 분명 이 아이는 ‘한덕’이 자신의 다리를 잘랐다고 하니, 함부로 판단하긴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의금부는 정황상 유력한 용의자였던 귀덕을 아이에게 데려가 질문했다.
“아이야, 너는 이 사람(귀덕)을 아는가?”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야, 발을 자른 자가 이 사람(귀덕)인가?”
이 물음에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야, 이 사람(귀덕)이 너를 살렸는가?”
그러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야, 이 사람(귀덕)이 너를 데리고 갔을 때 네 발이 잘려져 있었느냐?”
그러자 아이가 대답하기를,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정황상 한덕이 아이의 발을 자르지 않은 것이 분명했고,
손금, 자질금, 수은, 을비 등의 증언을 곱씹어도 한덕은 혐의가 없음이 맞다.
물론 아이는 한덕이 자신의 다리를 잘랐다고 했기에,
한덕을 추문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지만,
5세의 이 미욱한 아이의 말만 믿고 한덕을 고문하여 함부로 심문할 수는 없었다.
이때 의금부에서 중종 대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하, 저희 조선의 율법에서도
’80세 이후와 10세 이전 사람의 말을 무조건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라는 법이 있나이다.
귀덕이 아이의 발이 잘리지 않았을 때 데리고 간 것은 명백하니,
아이의 증언이 있다 하더라도 한덕이 발을 자르지 않은 건 이로써 분별할 수 있나이다.”
허나! 사건이 애매모호하니, 저희들은 도저히 이 사건을 조처하지 못하겠나이다.“
의금부의 보고를 접한 중종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을 아이에게 보이며 ‘이 사람이 네 발을 잘랐는가?’하면, 아이가 모두 아니라고 하는데,
오직 한덕을 보이면 한덕이 자신의 발을 잘랐다고 하니,
아이가 한덕과 귀덕에게 애증이 있어서 그런 말을 했겠느냐!
우리 나라(조선) 법률에서 10세 이하 아이의 말을 신뢰하지 말라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아이의 증언을 무시할 순 없다!“
그리고 2월 21일, 중종 대왕은 신하들을 소집해 다음과 같이 전교했다.
“발을 자르는 것은 잔혹한 것으로 세상에 드문 일이다.
백성을 보살피는 정사 중에 가장 먼저 할 일로,
이같은 어린 아이를 구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은 없다.
해조에게 적절히 마련하여 음식을 그 노비 아이에게 제급하게 하라.
그리고 이 아이의 일은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김귀성의 집에서 잘 보호하게 하였는데,
지금은 중덕이 어미임이 밝혀졌으니 그 아이를 어미에게 돌려보내야 한다.
그리고 발이 동상으로 빠진 것인지, 칼로 자른 것인지는 자세히 살피면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의술에 능통한 의원과 한성부의 낭관에게 다시 살피고 검사하게 할 것을 의금부에 이르라!”
급기야 금부 도사 이창무가 의원들을 데리고 가서 그 여자 노비 아이를 살펴 보게 하였고,
의원들이 다 살피고나서, 의금부는 의원들의 진단 결과를 보고받았다.
그리고 승정원이 의금부의 뜻으로 중종 대왕에게 아뢰기를,
“금부 도사 이창무가 의원을 데리고 가서 발이 잘린 노비 아이를 살펴 보게 하였나이다.
동상으로 빠진 곳은 두 발의 안팎의 복사뼈와 골구(骨臼)가 완전하며
살은 썩어도 힘줄은 남아 있는 것인데,
이 아이는 끊어진 곳이 이와 다릅니다.
복사뼈 위 정강이뼈의 부러진 곳이 날짜가 오래되어 새살이 나고 살가죽이 줄어 들었으니,
이는 칼로 자른 것이 명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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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고에 의하면, 결국 마지막으로 아이를 주웠던 귀덕이 명백한 용의자임이 분명했다.
귀덕은 분명 아이의 발이 동상에 의해 빠졌다고 했는데, 의원의 진단 결과(아이의 다리는 칼에 의해 잘렸다), 귀덕이 거짓 증언했음이 명백히 밝혀졌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의 증언이 걸리긴 했고, 중종 역시 아이가 지목한 한덕이 의심스러웠기에, 신하들에게 한덕을 형추(고문하여 심문)하는 것이 어떻겠냐며 말했다.
2월 29일, 판의금부사 김금사가 사건 자체의 방향이 잘못되었다 판단하고 새로운 보고를 올렸다.
“전하… 비록 의원에 의해 아이의 다리가 칼에 의해 잘렸음이 밝혀졌지만,
의원의 말을 근거로 성급하게 판단하시면 아니되옵니다.
과거에 ‘유물금’이라는 자가 동상에 의해 발이 빠진 경우가 있었는데,
그 발도 마치 칼로 잘라 끊어진 듯한 모양을 가지고 있었나이다.
이렇듯 인간은 동상으로 발이 빠지는 경우가 충분히 발생하는데,
하물며 여린 아이의 발이겠습니까?
설렁 정말 그 발이 동상에 걸려 빠졌다면, 귀덕이 악한 마음이 있어서가 아닌,
치료를 잘 하지 못해 발이 빠진 것이니, 어찌 죄를 물을 수 있겠나이까.
허나 의원의 말에 의하면, 그 아이의 다리가 칼에 의해 잘렸다고는 하니,
일단 한덕은 놔두고 귀덕을 계속 심문하는 것이 옳다고 사료되옵니다!“
그러자 중종 대왕이 맞받아쳐서 말하기를,
“경의 말도 일리가 없는건 아니오.
허나 그 아이는 한덕이 자신의 다리를 잘랐다고 말했을 뿐 아니라, 솜으로 입을 막은 상황까지도 분명히 말했으니, 이는 비록 아이라고는 하나, 나이가 4세가 넘었는데 무슨 말인들 알지 못하고 무슨 일인들 알지 못하겠는가!
혹은 무슨 원한이 있어 거짓으로 이런 말을 했겠는가?
허면… 그 아이가 누군가에 의해 다른 집에 가고 나서
한덕이 쫓아가 몰래 자른 것이 아니겠는가?…
이 일은 경솔하게 처리하면 아니되기에, 해당 부서에서만 의논하지 말 것이다.
대신들을 모두 불러 의논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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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대왕은 조선 최고의 행정 기관이었던 의정부의 대신들에게 최후의 의견을 물었다.
그리하여 2월 말엽, 이 노비 아이 사건과 관련하여 3정승이 자신들의 의견을 솔직하게 진솔했다.
영의정 정광필
“노비 아이가 말한 것을 보면 한덕이 한 짓이 맞는 것 같으나, 정황상 엄밀히 따져보면 한덕이 잘랐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확정지을 순 없사옵니다. 단지 미욱한 아이의 말만 듣고 큰 옥사를 만드는 것은 부당한 듯 싶사옵니다.
전하! 신의 생각으론, 이러한 의심스러운 옥사는 끝까지 밝혀 내지 않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을 듯 하옵니다!“
좌의정 장손순
“신도 이 사건을 들었나이다.
신의 뜻에는 의금부의 아룀이 온당하게 여겨지옵니다!“
우의정 한효원
“아이의 말을 살펴보면, 입을 막고 발을 잘랐음이 지극히 분명하여
4~5세 밖에 안 된 어린 아이가 능히 꾸며낼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형추하여 사실을 알아내는 것이 매우 온당할 것이옵나이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진술서를 보면, 여러 차례 집을 옮겨 다녔으므로 동상이 걸린 것도
또한 분명한 것 같사옵니다.
이런 의심스러운 옥사는 끝까지 추문하더라도 실정을 알지 못할 것이요,
오히려 무고하게 죄없는 사람이 죽을 폐단까지 있나이다.
더구나 동상에 걸려 발이 빠질 수도 있는 것이옵니다.
성상 전하께오서 재결하소서!“
결국 사건은 이렇게 종결되었고,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고문을 한다고 하더라도, 고문에 의한 거짓 증언이 나올 수도 있으며,
그렇게 되면 사건만 더 미궁 속으로 빠질 것이다. 아무튼 더 이상 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중종은 귀덕을 석방 조치하였고, 중종 대왕과 조선 조정은 그 노비 아이에게 평생 곤궁하지 않을 정도로 막대한 음식과 재물을 하사하는 선에서 사건을 종료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은 조선 시대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3줄 요약>
1. 한 아이가 다리가 잘려진 채로 강 부근에서 발견됨(사건 접수)
2. 온 나라가 이 사건에 집중하면서 한성부와 의금부, 승정원 등이 사건 해결에 움직임
3. 그러나 엇갈리는 증언과 애매모호한 진술 등으로 섣불리 판단을 내릴 수 없었고, 조선 시대 미제 사건으로 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