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 종결 사건 File] 5. 페스카마호 선상반란 사건 (1996)
흔히, ‘작은 사회’ 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학교, 군대, 가정ㅡ 혹자는 사람이 모인 곳이라면 어디든지 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는, 인간 본위의 순수성이 만들어낸 몰지각한 표현이라 비난하는 경우도 왕왕 있으나 이와 같은 주장이 어느방향 설득력이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작은 사회’라고 일컫는 것들로부터 하여금 깨달을 수 있는 것이란 실로 간단하면서도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이라 말하겠다.
이를테면, 선상船上은 작은사회다.
물과 식량은 한정되어 있으며, 움직일 수 있는 곳 또한 한계가 명확히 정해져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ㅡ중요한 것은 다수의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명확한 계급적 관계가 설정되어있는, 일종의 계급제 사회가 작디작은 배 위에서 이루어지고, 지금도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경탄스러우면서도 새삼스레 많은 의문들에 대한 촉매제가 되어주는 것이다.
단언컨대 혁명革命은 오늘날의 인간사회를 매개한 인류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자연환경, 인간관계, 사회에 이르기까지 정체되지않고 끊임없이 혁명을 통해 바꿔나가려는 본능이, 현재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모든 문화, 문명의 근간을 이루었음에는 반박할 여지가 없으며 비로소 원숭이나 침팬지와 같은 유인원과 인간을 구분짓는 가장 큰 차이점이라 하겠다.
그러나, 인간의 이러한 ‘혁명적’ 본능은, 때아닌 비극으로 치닫기도 한다.
자신을 잡아태울 주홍빛 불길에 본능本能적으로 몸을 싣는 불나방이 그러하듯이.
가장 용서받지 못할 점은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지배하려 하지않는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페스카마 15호>
1996년 6월 7일. 부산항 (출항)
<페스카마 15호> 는 본래 파나마 선적이었으나 한국에 임대방식으로 들여와 원양어업에 사용하던 어선이었다.
주로 남태평양에서 참치잡이를 하는 것이 이 배와 선원의 주요 목적이었으며 선원은 한국인으로 이루어진 간부조와, 이를 보조하여 전반적인 일을 수행하는 노동자 조로 이루어져있었다.
이 ‘노동자 조’는 한국인 보다는 주로 동남아에서 돈을 벌기위해 찾아온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하였는데 이들은 임금이 저렴했을 뿐만아니라 인종적으로도 일을 성실하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페스카마 호가 부산항에서 출항할때 배에 타고있었던 인원은 어업 회사였던 ‘동원수산’ 에 소속되어있던 선장 최기택 (이하 최선장) 을 위시한 한국인 7명과 인도네시아 선원 10명, 총 17명이었다.
이 17명의 인원을 태우고, 페스카마 호는 머나먼 항해길을 위해 출항했다.
아주, 머나먼 항해길로ㅡ
<조선족 선원 7명을 이끌던 우두머리 전재천>
1996년 6월 15일. 괌 인근 해역 (출항 8일째)
페스카마호는 부산항을 출발하여 8일간 항해한 끝에 괌 인근의 ‘타니안 섬’에 도착했다.
부산항에서 미처 조달하지 못한 물자를 보급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목표 작업량을 달성하기 위해선 추가적인 노동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한국인 수뇌부들의 결정 때문이었다.
선원을 찾는 일은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최선장은 이미 회사에 추가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출항 이전부터 계속적으로 타진해왔었기 때문에, 이미 섬에는 물자와 함께 필요한 노동력 까지 갖추어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조선족 7명으로 이루어진 임시 선원조였는데, 무엇보다도 조선족으로서 한국말이 가능했던 덕분에 의사소통에 있어서나 임금 문제에 있어서나 용이할 것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유일한 문제는 조선족 7명 중에서 정규 선원자격을 갖고 있는 사람이 우두머리인 전재천 밖에 없다는 것이었는데 한국인 수뇌부가 그리 어렵고 복잡한 매커니즘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끝에 이들은 고용되어 배에 승선했다.
<미국령 사모아 해는 여전히 참치의 주산지로서 수많은 참치잡이가 이루어지고 있다>
1996년 6월 27일. 미국령 사모아 해 (출항 20일째)
곧 페스카마호는 전반적인 참치잡이가 이루어지는 사모아 해에 도착했다.
한국인 선원들은 이미 오랜기간 바다에서 경험을 쌓은 베테랑이었고 인도네시아 선원들 또한 경험이 있었기에 일에 적응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기간이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조선족들이었다. 공산화된 중국에서 평생을 살아오다 참치잡이 배에서 적응하기란 좀처럼 쉽지않은 일이었고 대부분이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 못했던 탓에 그물을 치는법, 선체 밸런스를 잡는 법 등 선상 기술을 가르치는 데에 많은 애로사항이 존재했다.
때문에 최선장과 한국인 간부들은 갑판에 조선족들을 불러모아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점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으나 서로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자 이는 곧 최선장의 구타로 이어졌다.
최선장은 선내에 있던 쇠파이프를 들고 본보기를 삼아 조선족 1명의 어깨를 후려쳤다.
이에 격분한 조선족 선원은 최선장의 뺨을 때리고 참치손질용 칼을 들어 한국인 선원들과 대치하게 되었다.
페스카마 호는 칼부림을 목전에 둔, 실로 위태위태한 상황이었다.
교착상황이 계속되자, 조선족 선원들은 “일을 못하겠으니 지상으로 돌려보내달라” 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는 말도 안되는 요구였다. 원양어선 사업은 엄연히 합법적 회사와의 계약을 통해 이루어지는 투자사업이었으며 중간에 하선하게 될 경우 계약 위반으로 위약금을 물게되는 것은 물론 선원들이 출항 직전에 보증금으로 달아두었던 금액들 또한 고스란히 회사로 넘어가게 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선원들의 본국 송환비용과 같은 부가 비용 때문에 예상치못한 중도하선이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어떻게든, 최악의 상황은 면해야 했다고 생각했던 최선장은 곧 조선족 선원들과 화해를 요청했고
선상의 분위기는 아주 잠시나마 제 궤도를 되찾은 것만 같았다.
그러나 최선장의 이러한 결정은 곧, 궤도를 이탈해 점점 생각지도 못한 최악의 상황에 치닫고 있었다.
1996년 7월 28일. 미국령 피닉스 해 (출항 51일째)
지난 6월 27일, ‘선상 대치사건’ 이 있은후 조업은 가까스로 진행이 되긴 했으나, 조선족은 사건 이후로 ‘한국인 간부들도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이는 곧 명령 불복종, 업무 태업 등으로 서서히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선장을 비롯한 한국인 간부들은 이미 흐름을 뺏긴 상태였다.
조선족들이 벌이는 태업에 이렇다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었다. 폭력을 사용하면 칼을 들고, 큰소리로 명령을 하더라도 들은척 만척하는 이 조선족들의 행위에 가장 먼저 들고 일어난 것은 그동안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던 인도네시아 선원들이었다.
‘어째서 조선족들은 대충 일하는데 우리와 같은 급여를 받는가’
‘왜 한국인들은 조선족들에게만 일을 덜 시키는가’
선상 대치사건을 목격했던 인도네시아 선원들이었으나 더이상 차별적인 대우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곧 선상의 선원들은 세그룹으로 나누어진다.
– 최 선장을 비롯한 한국인 간부 7명
– 우두머리 전재천 을 비롯한 조선족 선원 7명
– 인도네시아 선원 10명
이 위화감은 날이갈수록 더해졌고, 곧 최선장은 중대한 결단을 내리기에 이른다.
급히 선상 징계위원회를 소집, 조선족들에게 강제 하선을 시키기 위해 조업을 중단하고 사모아 어업기지에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조선족들로 하여금 계약서에 사인을 하도록 하는데 ‘중도 하선으로 인한 모든 물질적 피해를 조선족들 본인이 부담한다’ 는 것을 주요 골자로한 계약서였다.
곧 최선장은 어업기지에 연락하여 ‘선원들의 풍기와 선상 분위기가 불량하여 조업을 지속할 수 없으니 귀환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하고 배를 돌려 어업기지로 향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족 그룹은 곧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본국에 돌아가게 되면 계약 위반으로 회사에 지불해야하는 위약금을 몽땅 부담해야할 뿐만 아니라 본국 송환 비용과 같은 모든 물리적 피해가 빚으로 남아 평생 쫒기면서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또한 승선전 맡겼던 보증금 5만원 (당시 중국의 한 달 평균 월급은 약 500원이었다) 은 고스란히 회사로 넘어가는 것이며 최악인 것은 ‘작업태도 불량’으로 강제 송환될 경우 다른 배에서 선원생활을 이어나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겨우 상황을 파악한 조선족들은 한국인 간부들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 죄송합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조업을 계속해주십시오 ‘
그러나 최선장은 완고했다. 이미 지난 한달간 조선족과 작업을 한 결과 그들의 작업 능력이 인도네시아나 다른 나라에서 온 선원들보다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을 알게됬을 뿐만 아니라 선내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드는 등 오히려 조업에 방해만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뭣보다도 회사에 이미 회항 통보를 타진한 상태였기 때문에, 회사는 사모아 어업기지에 조선족 7명을 대체할 선원들을 먼저 준비해놓은 상황이었다.
배는 선두를 돌려 지상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1996년 8월 3일. 미국령 피닉스 해 (출항 57일째)
새벽 3시.
조선족 선원 6명은 어두운 선실에 모여 속삭이는 목소리로, 모종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윽고, 한국인들에게 순종적으로 임했던 조선족 1명을 제외한 나머지 6명은 마침내, 다음과 같은 내용을 골자로한 계획을 세웠다.
– 1등 항해사 이 씨를 제외한 한국인을 모두 죽이고 한국으로 배를돌려 도주한다
선상반란(船上反亂)이었다.
곧 조선족을은 조타실에 모여 최기택 선장을 유인하여 죽이고, 바다에 시체를 던져넣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국인 간부들이 자고있는 선실에 들어가 한명씩 깨우고는
” 최선장이 조타실로 부르니 지금 가보시오 “
한명씩 조타실에 도착하는대로 칼로 온몸을 난자한다음, 바다에 유기해버렸다.
이렇게, 배 위에 남은 인원은
– 한국인 1등 항해사 이인석 씨 (1명)
– 조선족 (7명)
– 인도네시아 선원 (10명)
총 18명이었다.
날이 밝자, 선상을 지배하게된 것은 조선족들이었다.
일등 항해사를 협박해 한국으로 방향을 틀게 만든 후, 식량창고를 장악해 배를 실질적으로 지배하에 놓게 되었다.
이와 같은 조선족들의 횡포에 들고일어난 인도네시아 선원들은 곧 무기를 들고 조선족들과 대치했으나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빈틈을 노린 조선족들이 인도네시아 선원 3명을 잔혹하게 때려죽인끝에 상황은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조선족들은 하나 착각한 것이 있었다.
한국까지 향하기에는 이미 선내의 연료가 많이 소모된 상태였기 때문에 곧 표류할 위기에 처했을 뿐만 아니라 식량을 관리하던 한국인들을 모조리 죽여버린 까닭에 창고에는 썩은 고기만이 뒹굴었던 것이다.
선원들은 모두, 완벽한 고립상태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곧 조선족들은 인도네시아 선원들과 함께 목선을 건조하여 배에서 탈출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식량 문제는 어쩔 수가 없어 조선족들은 썩은 고기를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사태는 점점 끝이 보이고 있었다.
연료가 모두 동나고, 식량도 썩은 고기밖에 남지않자 조선족들은 점점 이성을 잃기 시작했다.
이내, 식량창고에 남은 마지막 고기들을 꺼내기위해 조선족 들이 창고에 모두 들어간 상황.
곧, 상황을 반전시킨 것은 마지막 남은 한국인 생존자, 일등항해사 이씨 였다.
인도네시아 선원들을 포섭하여 조선족들이 모두 창고에 들어가자ㅡ
바깥에서 문을 잠궈 몽땅 가둬버렸다. 선상반란이 이제야 모두 제압된 것이었다.
이내 이씨는 지나가는 일본 어선에 신호를 보내 간신히 페스카마호를 어업기지까지 예인시키는데에 성공했고, 본국으로의 송환 과정을 거쳐 페스카마호는 1996년 8월 31일. 부산항에서 출항한지 80여일 만에 다시 부산항에 닻을 내리게 되었다.
부산항에 도착하고, 기자들에 둘러싸인 일등 항해사 이인석 씨가 가장 처음 내뱉은 말은 다음과 같았다.
” 혼자만이 살아와서, 미안합니다 “
[ 기타 사실들 ]
# 1. 그들이 죽인 한국인
선원들 중에는 이동을 위해 잠시 배를 옮겨탄 최동호군 (당시 20세) 이 승선하고 있었으나 승선 6시간만에 산채로 바다로 던져졌다. 이후 행방은 알 수 없다.
# 2. 부산항 귀환, 이 후
조선족들에 대한 처벌이 국제법상으로 옳은가에 대한 여부에 대해 논란이 오갔으나 검찰은 그대로 한국형법을 적용하여 조선족 우두머리이자 주동자인 전재천에게 사형을, 나머지 5명의 조선족들과 이에 가담한 인도네시아 선원들 모두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페스카마 호 관련 재판이 이루어지던 상황에서, 국제법상의 저촉을 이유로 조선족과 인도네시아 선원 전원의 무죄를 주장하며 이들의 변호를 맡은 사람이 바로
당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문재인 이었다.
참고 : 만화 [선상반란], 박인권
http://cafe.daum.net/dacultureNO/6qxQ/628?docid=1EXp16qxQ62820121031135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