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미제사건 File] 24.신호수 의문사 사건 (1986)
<취급주의>
본 사건은 이미 재판이 종료된 사건이나,
그 경위나 결과에 대한 의혹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사건으로서
미제사건으로 인식함.
(곧, 엄밀히 말해 ‘영구미제’ 사건이 아니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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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사람은 무수히 많은 이유로 죽는다.
발을 헛디뎌 죽기도 하고(失足死), 제대로 먹지못해 죽는 경우도 있으며(餓死)
피치못한 사고에 의해 명을 달리하는 경우(事故死)ㅡ 를 비롯하여
인간의 죽음을 일컫는 말만 하더라도 그 수를 이루 가늠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이와같은, 죽음에 관련한 어휘들은 모두다 인과율에 기인하여 만들어진 것들이다.
요컨대ㅡ’어떻게’ ‘어떠한 방식으로’ 죽었는가 하는 문제만이 사인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 것인데
수사를 해야하는 측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것이 바로 이 ‘원인’을 전혀 짐작할 수 없을때라 하겠다.
이를테면, 사인이 추측되는대로 흉기를 찾고, 흉기를 찾아낸 다음에는 지문을 추출하거나
그 출처를 밝혀내어 용의선상을 좁혀가는 방식인 것인데, 실로 사인을 알 수 없는
ㅡ이 의문사(疑問死)의 경우야 말로 전통적인 수사방식에의 강력한 저항이매 돌연변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죽은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흉기를 찾을 수 없고, 흉기를 찾을 수 없으니 범인 또한 추측할 수 없다.
원인이란 없이, 어떤 방식으로든 죽어있는 사람이라는 결과만이 덩그러니 눈앞에 떨구어져 있을 뿐이다.
명백한 인과율의 위반.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이 이율배반적 풍경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앙상한 결과의 뼈대에 인공人工의 이유를 덕지덕지하게 펴바르는 일밖에는 없다.
사는것도 모르거늘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未知生 焉知死) – 공자
1986년 6월 19일, 전라남도 여수 대미산(전남 여천군 돌산읍)
한 방위병사가 선임의 명령으로 산속으로 산딸기를 따러 올라가던 중이었다.
산딸기는 좀처럼 보이지않았고, 때문에 병사는 더더욱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는데
이내 산바위 더미앞에 다다랐고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기위해 고개를 돌렸는데
때아닌 위화감이 온몸을 휩싸기 시작했다.
간신히 고개를 돌린 곳에는 자그마한, 아니 성인 한명이 들어갈만큼의 동굴이 있었다.
바위산이라면 어디던지 두어개는 있을법한 평범한 동굴이었으나ㅡ
병사는 본능적으로 동굴안에 ‘무엇’이 있음을 직감했는지 동굴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동굴안은 대낮임에도 그늘이진 까닭에 어두컴컴했고, 때문에 동굴안의 어떤 것도 그 정확한 형태를 가늠하기는 어려웠으나 산딸기를 따러갔던 한 방위병의 눈에 비친건 분명히 목을 맨 시체 의 실루엣이었다.
곧 출동한 경찰은 이내 바위 동굴 안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손전등 불빛을 비추자 점차 드러나는 실루엣의 모습.
ㅡ한 남성이 팬티만 입은채로 목을 매 죽어있는 광경이 펼쳐졌다.
동굴 자체가 성인 남성이 겨우 들어갈법한 좁은 동굴이었고,
빛이 얼마 들지않아 현장의 상황을 파악하는데에는 어느정도 시간이 소요되었으나
많은 시간을 들였음에도 알아낼 수 있었던 사실은 다음에 불과했다.
– 정체불명의 사체가 바위틈에 묶인 옷가지에 목을 매 죽어있었다. (묶인 옷가지는 사망자의 것으로 추정)
– 몸통과 양팔이 허리띠로 강하게 묶여있었다.
– 동굴은 바닥에서 목을 맨 천장까지 약 2.5M 간격
가장 눈에띄는 사실은 사체의 몸통과 양팔이 허리띠로 묶여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사체가 인적이 없는 곳에서 목을 매고 죽었다는 것에서 경찰은 가장 처음 자살으로 추측하였는데
이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했다.
첫번째. 동굴은 빛이 거의 들지않는 어두운 공동이었고
두번째. 목을 맨 천장이 2.5M, 사체의 키는 165cm였으며
세번째. 양팔을 묶고선 이런 환경에서 스스로 목을 매는 일련의 과정을 수행할 수 없다 는 것
경찰은 곧 사체의 신원확인에 들어갔고, 간략한 부검끝에 목 맨 시체의 신원이 확인되었다.
사체의 정체는 ‘신호수’ 라는 23살의 젊은 가스배달부였다.
수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는데, 경찰은 곧 신호수의 사인을 ‘자살’로 결정냈다.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 인적이 드문 바위동굴에서 자살을 했으며, 자신의 소지품을 모두 태운 흔적이 있고,
몸통과 양팔을 허리띠로 묶은 것은 결심이 바뀌지 않기 위함이다 “
그러나 경찰이 내놓은 근거란 완전히 초점을 벗어난 것이었다.
중요한것은 왜 허리띠를 묶었냐는 것이 아니라, 양팔을 묶고 동굴안에서 자살을 할 수 있느냐는 가능성에 대한 문제였다.
하지만 경찰은 기어이 자살로 결론을 내려버렸고, 시체는 부검 후 곧장 매장해버렸다.
ㅡ때문에 신호수씨의 유족들이 사망소식을 접했을 때에는 이미 땅에 묻힌 상태라는 어이없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신호수의 부친 신정학 씨가 사체가 발견된 동굴을 직접 조사하는 모습>
슬픔에 잠긴 신호수씨의 부친 신정학 씨는 사건에 대해 알아보던 중 몇가지 의미심장한 사실을 발견했다.
사체가 발견되기 열흘 정도 전인 1986년 6월 11일.
신호수가 직장인 인천에서 서울 서부경찰서 대공과 소속 경찰관에게 체포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혐의는 ‘국가보안법 위반’ 이었다. 곧 간첩 혐의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었는데,
근거는 신호수의 자취방에 숨겨져있던 북한 삐라 수십장이었다.
전말은 다음과 같았다. 전년도인 1985년, 신호수는 전라남도 장흥에서 방위병으로 근무중이었는데
신호수가 근무하던 부대에선 북한 삐라를 수십장 가져오면 군 포상휴가를 내려주는 규정이 있었다.
때문에 신호수는 삐라를 자취방 장판에다 숨겨놓았었는데 소집해제가 되면서 자취방을 내어주다
삐라를 발견한 한 것이었다. 곧 집주인이 경찰에 신고를 하게되면서 간첩혐의로 의심받기 시작했다.
<신호수>
신호수를 연행한 차모씨는 이러한 오해를 인정하고 ‘체포한지 3시간만에 훈방조치했다’ 고 증언 했으나
신호수를 체포한 이 과정은 9개월 전부터 진행된 이른바 ‘장흥 공작’ 프로젝트로
상당한 기간을 거친 수사였는데, 고작 3시간만에 ‘훈방’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것이었다.
또한 차모씨는
” 훈방 조치할 때 신호수가 지리를 잘 모른다고 해서 서울역까지 차로 데려다주었다 “
고 주장했으나, 신호수는 서울역 근처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던 사람이었다. 곧, 서울역 근처의 지리를 몰랐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내 신호수의 유가족은 ” ‘장흥공작’과 관련하여 신호수를 간첩으로 조작하려다 사망하자 이를 자살로 꾸며 은폐하려고 했다” 며 정부에 2011년,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하였으나 서울 고등법원의 판결은 다음과 같았다.
“피고 대한민국의 불법 구속으로 인한 신호수의 위자료 청구는 인정하나 경찰의 가혹행위는 증거 불충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2013년 현재,
여전히 신호수 의문사 사건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은채로 남아있다.
– 기타 의문점
#1. 대미산
– 대미산은 여수시 돌산읍 평산리에 위치한 돌산. 인근 주민도 잘 알지못하는 산이었으며 해안지대에 근접해있어 무장공비와 접선하기에 적합한 장소로서 경찰이 대공수사와 관련해 크게 주목하고있는 장소였다. 신호수는 고향이 여수였으나 일찍이 서울로 옮겨와 살았기 때문에 여수의 지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으며 이 ‘대미산’은 여수에 살던 유족들조차도 알지못하는 산이었다.
#2. 훈방조치
– 훈방조치를 했다는 수사관이 근거로 제출한 경위서와 신호수가 자필로 쓴 원서의 필적을 국과수에 의뢰, 동일하다는 감정을 받았으나 유족이 사설감정기관에 맡긴결과 서로다른 필적으로 판명된바 있다. 국과수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에서도 필적감정 논란을 일으킨적이 있다.
#3. 자살
– 만약 자살이라면 나름대로의 준비가 된 상황에서 진행되었어야 했는데, 급하게 자신의 옷으로 목을 맨점. 온몸에 걸쳐 자잘한 상처가 당시 부검사진에 나와있었으나 부검결과서류에는 명시되지 않았다.
#4. 간첩
– 당시 반공정책중 간첩을 세명 잡으면 특진을 시켜주는 경우가 더러 존재했다.
참고링크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5&aid=0000100143
http://interview365.mk.co.kr/news/2066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8&aid=00001319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