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미제사건 File] 22.제국은행 사건 (1948)
<취급주의>
본 사건은 이미 재판이 종료된 사건이나,
그 경위나 결과에 대한 의혹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사건으로서
미제사건으로 인식함.
(곧, 엄밀히 말해 ‘영구미제’ 사건이 아니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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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범죄의 실질적인 기반은 ‘기만’ 이라고 하겠다.
살인, 강도, 납치ㅡ 어떤 형태의 범죄든지간에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거짓과 속임수가 동반될 수 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수많은 거짓말을 하며 살아간다.
그 혀끝에서 나온 철저히 기만적인 언사들이
알게모르게 사람을 죽이며, 살리는 도구가 되었을런지 모른다.
어쩌면 범죄란 그 일련의 과정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났을 뿐인
사회의 수많은 암면들 중 하나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시금 말하건대 범죄의 기초는 사람을 속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다만, 반대로 생각한다면ㅡ 범죄는 사람이 ‘속기 때문에’ 발생한다.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하고,
또한 다른 누군가의 거짓말에 의해 끊임없이 속으며 살아간다.
ㅡ오늘 하루도 약 3000건의 범죄가 발생하는 이유다.
1948년 1월 26일 오후 3시 경
일본 도쿄도 도시마구 제국은행 시이나마치 지점
은행 업무는 거의 끝을 맺고있었고 은행안에는
직원을 포함해 기껏해야 열댓명 남짓한 사람만이 남아있었다.
한적한 은행의 분위기 와중에 중년의 남자 한명이 은행 문을열고 들어왔다.
인상착의는 별 다를 것이 없었으나, 어깨에 하얀색 완장을 차고있었는데
‘도쿄도 방역반’ 이라고 적혀있는 것이었다.
곧 중년의 남자 는 직원에게 자신을 후생성(당시 일본에서 국민 위생을 담당하던 부서) 의 직원이라고 소개한 후
이내 은행안에 있는 사람에게 소리쳤다.
“근처의 주택에서 괴질이 발생했습니다! 곧 GHQ가 은행내를 소독할 예정인데, 그 전에 전염을 예방하기 위해서
여러분께선 제가 드리는 약을 먹어주셔야합니다”
GHQ : 당시 2차대전 종결후 일본내에 주둔하던 미군정을 일컫는말
말을마치고 중년 남자 는 직접 약을 먹어보임으로서 시범을 보였다.
“약의 성분때문에 그냥 먹으면 치아의 에나멜질이 상할 수 있으니 이렇게, 혀를 쭉 빼서 삼켜주십시오”
당시 도쿄는 전쟁직후 폭격으로 인해 파괴된 상수도시설이 복구되지 않았던 까닭에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었고, 때문에 은행 직원과 손님들은 아무의심없이 약을 삼켜먹었다.
은행안에 있던 모두가 약을 먹은지 얼마되지 않아,
가슴이 타는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그러자 그 중년의 남자 는 다른 약을 가방에서 꺼내며
“진통제를 드릴테니 다들 드십시오. 이걸 먹으면 가슴통증이 나아질겁니다”
곧 사람들은 모두 남자가 주는 ‘두번째 약’을 먹었지만
가슴의 타는듯한 통증은 사라지지않고 더더욱 심해질 뿐이었다.
고통을 참지못한 한 여자가 ‘물로 입을 헹구어도 되겠습니까’ 라고 묻자
중년의 남자 는 그것을 허락했다.
1948년 1월 26일 오후 4시 경
도쿄 시내를 걷고있던 사람들은 지나가던중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한 여자가 끊임없이 구역질, 실신을 하면서 은행에서 간신히 기어나오는 것이었다.
이내 여자는 이상한 말을 지껄이기 시작했는데,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자세히 들어보건대 ‘도와달라’ 는 말투인 것 같았다.
이 광경을 보고 시민들은 경찰에 곧바로 신고했고,
이내 경찰이 도착해 은행안으로 들어가자 그들의 눈앞에는
형용하기 힘든 끔찍한 광경이 벌어져있었다.
은행앞에 실신해있는 여자를 포함해 16명이 중독되어 쓰러져있었고
11명은 현장에서 사망하였으며 한명은 병원으로 이송하던 중 숨졌다.
당황한 경찰은 급히 피해자들의 생사를 수습하는데에 급해
은행 안 현장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초동수사에 실패하고 말았다.
은행 창구에있던 16만엔과 수표 17,450엔 이 사라졌음에도
이를 알아챈 것은 사건이 발생한지 2일후인 1월 28일이었다.
그리고, 도난당한 수표는 사건 다음날인 1월 27일에
이미 타 은행에서 현금으로 교환된 상태 였다.
경찰은 사건을 조사하던 중,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2건이나 존재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는 다음과 같았다.
1. 야스다 은행 사건
– 1947년 10월 14일. 은행 문이 닫힌 직후 ‘후생성 의학박사 마츠이 시게루’ 라는 명함을 보여주는 사람이 찾아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질 감염자가 오전중 이 은행에 왔다간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직원의 손과 돈을 소독해야한다”
지점장은 이를 확인해보기 위해 경찰을 불렀고, 곧 도착한 순사는 “무슨 아닌밤중에 홍두깨냐. 우선 서에 확인은 해보겠다”며 다시 경찰서로 돌아갔다.
순사가 사라진 와중에, 그 남자는 직원들을 불러 제국은행과 똑같은 수법으로 약을 먹였다.
다행히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언론에서 크게 다루지 않았던 사건이었다.
그 남자가 보여준 명함 (마츠이 시게루)은 진짜였으나 사건이 발생한 당시 진짜 ‘의학박사 마츠이 시게루’는 외국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알리바이가 증명되어 범인은 찾지못했다.
2. 미쓰비시 은행 사건
– 1948년 1월 19일 (사건 열흘전) ‘후생성 의학박사 야마구치 지로’ 라는 명함을 보여주는 남자가 미쓰비시 은행 나카이지점에 은행 업무가 종료된 직후에 나타나 야스다 은행 사건의 범인과 비슷한 말을 하며 약을 먹이려 했으나 지점장이 ‘오늘 현금 수송이 없어서 괜찮다. 나가라’ 라고 말하자 남자는 은행원들이 정리하고있던 수표에 소독약이라는 투명한 액체를 뿌리고는 나갔다.
명함은 가짜였다.
일본 경시청은 앞서 발생한 두번의 사건과 겹쳐 용의선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용의자 :
- 도청·구청의 위생과, 방역과, 보건소, 병원, 의사, 약제사.
- 치과의사, 수의사, 생명보험 회사의 보험의사, 의학·화학·약학 연구원과 교수, 그 학과의 학생, 약품 제조업자·판매업자, 약품 중개인이나 그 경험자.
- 주둔군 통역, 사무원, 잡역부나 그 경험자.
- 은행원이나 그 경험자.
- 수해지 방역 종사 경험자.
- 전역자나 귀환 장교 중 의료 지식이 있는 자.
- 병원, 의원, 약국 등에서 청산염을 입수하거나 입수를 시도한 자. 또는 직업상 그것을 취급하는 자. 또는 그것을 취급하는 공장이나 제작소에 출입하는 자.
또한, 범죄에 사용된 약품을 조사한 결과 아세트시아노드린으로 추정되는 ‘청산 화합물’ 이었다.
요컨대 접촉하면 즉각 효과가 발생하는 청산가리가 아닌 시간차를 두고 약효가 발휘되는,
또 청산 화합물이란 사실 외에는 다른 단서를 알기 어려운 약품을 사용했다는 점.
그리고 “혀를 내밀어 삼켜라” 는 자세한 지시까지 내렸다는 부분에서
화학물질의 취급에 익숙한 자라는 것을 가정했으며
ㅡ구 일본군 세균전 특수부대였던 731 부대 관계자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 731 부대 : 1932년 하얼빈에 설립되어 일제가 패망하기 전까지 생화학 무기를 연구함. 한국,중국,러시아인들을 대상으로 잔혹한 생체실험을 벌였다.
수사 방향을 731 부대, 즉 일본군 특수요원으로 좁히게 된것은 구 일본군 육군 제 9연구소 소속의 ‘반 시게오’ 라는 사람으로부터 유력한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그 근거란 다음과 같았다.
첫번째. 범인이 사용한 청산가리는 0.2 ~ 0.5 그램에 불과한데, 이것은 치사량과 거의 일치하는 양이다. 범인은 최소한의 양의 독극물로 최대한의 효과를 보았다. 만약 범인이 초보였다면 독극물의 농도를 높이거나 양을 늘렸을 것이다.
두번째. 첫 번째 약과 두 번째 약 사이에 1분이라는 시간을 두었는데, 1분 뒤에는 피해자들을 방치했다. 이것은 1분이 지나면 독약이 듣기 시작하여 피해자들이 외부에 도움을 청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세번째. 범인이 사용한 스포이트는 ‘고마고메 형 피펫‘이라는, 세균 연구소나 군 소속 연구소에서 쓰인 것이다. 피펫 상자의 모양과 크기도 2차대전 때 군의관이 야전용으로 휴대한 외과기기 상자와 유사했다.
네번째. 범인은 한꺼번에 16명을 독살하려 했으면서 비정상적으로 침착했다. 약물을 측량하거나 따를 때도 손끝 하나 떨지 않았다. 이 침착함은 범인의 경험에서 우러난 자신감에서 나왔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렇게 육군 관계자에 대한 조사가 흐름을 타고있을 무렵 돌연 경시청에 GHQ(일본주둔 미군정)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내용인 즉슨,
ㅡ’육군 관계자에 대한 조사를 즉시 중단하라’
였다.
육군 특수요원에 대한 조사는 바로 취소되었다.
<사건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진임을 밝힘>
수사 방향은 동일인의 범행으로 추정되는 ‘야스다 은행 사건’ 에서 ‘후생성 의학박사 마츠이 시게루’의 명함을 중심으로 바뀌었다.
공교롭게도, ‘진짜’ 마츠이 시게루 박사는 외국으로 나가기전 딱 100개의 명함을 뽑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명함을 나누어준 사람, 장소, 날씨 등을 모두 수첩에 기록해두었던 덕분에 수사는 탄력을 받게 되었고, 명함 하나하나의 경로를 추적한 끝에 100개 중에 마츠이 본인이 갖고있던 8개의 명함과 나누어진 62개의 명함을 수거하는데 성공했고, 22개는 분실되었는데 이는 사건과 관계가 없는 것이 드러났다.
결국, 나머지 8장 중 하나가 범행에 이용된 것으로 판정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조사를 시작한지 얼마지않은 1948년 8월 21일.
용의자로 추정되는 한명을 체포하기에 이른다.
히라사와 사다미치, 템페라 화가였다.
<히라사와 사다미치>
히라사와 사다미치가 체포된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첫번째. ‘마츠이 시게루 의학박사’ 의 명함을 받았음에도 명함을 갖고있지 않았다.
두번째. ‘사건 발생시각에 제국은행 근처를 걷고있었다’ 고 진술했으나 알리바이가 증명되지않았다.
세번째. 과거 수표 사기를 저지른 전과가 존재한다.
네번째. 사건직후 은행에서 도난된 금액과 거의 동일한 금액이 히라사와의 통장에 예금 되었고, 이돈의 출처를 알 수 없다.
특히 히라사와의 통장에 예금된 돈에 대해서 히라사와는 일절 해명하지 않았는데 ‘그림을 팔아서 번돈은 아니냐’ 와 같은 질문에도 강력히 부정하였으머 이 돈의 출처는 아직도 드러나지 않았다.
히라사와는 자백과 범행 부정을 반복하다가 결국 범행 일체를 저질렀다고 자백하여 12월 20일, 공판에 들어갔으나 재판 직전 갑자기 범행 일체를 부인하기 시작하여 재판내내 결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1950년 7월 24일 도쿄 지방법원은 무언가에 쫒기듯 급하게 히라사와에게 사형을 언도하였고 히라사와는 고등법원과 대법원에 항소하였으나 모두 기각되었으며 최종적으로 사형이 결정된 채 재심도 받지 못하고, 사형집행도 되지않은채 수감생활을 보내다 1987년 5월 10일 하치오지 의료 형무소에서 폐렴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항소가 뚜렷한 이유도 없이 기각당한점, GHQ가 육군 관계자 조사를 중단시킨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히라사와가 용의선상에 들어있던 ‘약물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있던 자’에 해당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히라사와 사다미치가 진범이 아니라는 여론이 들끓었으며
2013년 현재,
히라사와의 유족(양자)들은 명예회복을 위해 도쿄지방법원에 재심을 청구하고있다.
[기타 의문점]
# 1. 히라사와 사다미치
– 히라사와는 광견병 예방접종의 후유증으로 ‘베르니케-코르사코프 증후군(허언증)’ 이란 정신질환을 앓고있어 이성적으로 진술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 당시 히라사와의 심문을 맡았던 형사가 고문에 가까운 심문을 한 정황이 드러났다.
– 히라사와의 자백조서가 검사에 의해 강제적으로 지장을 찍게하는 등 조작된 사실이 포착되었다.
# 2. 반 시게오
– 수사에 중요 정보를 제공하여 수사 방향을 일본군 특수요원으로 돌리도록 도운 육군 제 9연구소 소속의 ‘반 시게오’는 히라사와가 옥사한지 보름이 지난 5월 25일, TV방송에 출연하여 “범인은 육군 관계자다. 확실하다” 라고 강조했다.
# 3. 나루치 히데오
– 당시 사건 수사반에 있었던 나루치 히데오는 이후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히라사와처럼 독극물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사람은 범행이 불가능하며, 진범은 구 일본군 비밀요원 출신이다.
731부대에 상주하던 50여명을 개인적으로 조사해본 결과, 경력, 알리바이, 인상이 일치하는 것은 S중령 밖에 없다’
나루치 히데오가 지명한 S 중령은 사건발생당시 51세였으며, 이듬해 병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