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오대양 집단 변사사건 (1987)
<취급주의>
명목상 ‘종결사건’으로 되어있으나,
사건의 경위나 결과에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많으므로 ‘미제’사건으로 분류함
<사진주의>
시체사진 있음.
유럽의 중세시대는 소위 인간 위의 ‘신’이 지배하던 시대였다고 말한다.
종교라는 명목 아래 수많은 사람이 칼자루를 들고 피를 흘렸으며
급기야는 무고한 사람을 태워죽이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까지도 존재했다.
이윽고 암흑의 시대가 지난후, 꿈에서 깬 사람들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ㅡ’누가 그들을 죽였나?’
ㅡ사람이 죽는 경우는 크게 두가지로 나뉘는데,
자의에 의한 사망인지, 타의에 의한 사망인지의 여부이다.
곧 자살이냐 타살이냐 하는 것인데 여느 만화나 추리소설처럼
명확히 선이 구분되지 못하는 것이 이러한 문제다.
예컨대, 스스로 신변을 보호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강제로 목숨을 끊도록 강요받는 경우에는 자살인가 타살인가?
이처럼 물리적 자극이 아닌 ‘동기여부’가 개입될 때
시신이 자살인지 타살인지를 따지는 것은 적잖이 어려운 일이다.
적어도 차가운 다락방 갑판에서 죽어간 이들은
그들이 찬양해 마지않던 신의 곁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일까?
<오대양의 교주 박순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대한 사건의 시작은 ‘박순자’ 라는 여성이
횡격막에 병을 앓다 가까스로 병을 치료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였다.
박순자는 병이 치유된 것이 ‘신의 은총’ 이었다고 믿고,
‘여호와의 증인’, ‘구원파’ 를 비롯한 교회교파들을 전전하다
마침내 직접 시한부 종말론을 숭상하는 사이비종교의 교주가 되기에 이르렀는데,
이 사이비종교가 바로 ‘오대양 五大洋’ 이었다.
<오대양에서 제작한 공예품들>
‘오대양’ 이라는 이름은 지구를 둘러싼 다섯개의 대양ㅡ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남,북빙양을 일컫는 말인데 이는 박순자가
“나는 오대양을 지배할 사람으로 앞으로 전세계를 주관하게 될 것이다”
라고 공언했던 것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발전하게 된다.
신도를 끌어모으던 박순자는 1984년 공예품을 만드는 회사를 설립하는데
이 회사이름 또한 오대양으로 짓는다.
박순자를 포함한 종교간부들은 신도들에게 집단 생활을 강요하였고
인력을 착취하는 한편, 양로원이나 고아원들을 인수하여 사회사업을 하는 것마냥 꾸몄으나
실상은 노인들과 어린아이들에게 오대양의 교리를 주입시켜 세뇌시키려는 의도였으며
신도들의 명의를 이용하여 대규모 사채를 쓰게되면서 자본을 확충하였다.
또한 대전과 용인 등지의 공장들을 인수하면서 사업영역을 확장해나갔고,
1986년에는 일본의 전자부품 업체와 합작하여 7억을 투자, 전자제품을 만드려 시도했지만
기업간 대규모 사기를 당하게되면서 재정상황이 급격히 악화된다.
<학숙이라는 명목으로 신도의 자녀들을 모아 집단생활을 시켰다>
<오대양 공장에서의 작업현장. 오대양은 주로 수제공예품을 만들어 판매했다>
기업 상황이 안좋아지자 오대양은 더더욱 신도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보다 철저해진 집단생활은 물론이며, 부부를 더러 각방을 쓰게하면서 금욕생활을 하게했고
외출 또한 2주에 한번 단체로 하는 것 외에는 엄격히 금지했다.
오대양은 신도들에게 더더욱 과도한 사채를 강요했고
그 결과 박순자가 끌어모은 자본은 170여억원에 달했다.
이 결과 대출금 상환을 독촉하러 오대양 공장을 찾았던 채권자가
신도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고 오대양을 고소하는 해프닝이 발생하면서
오대양과 박순자의 사기혐의가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
경찰, 언론의 압박과 막대한 채무독촉.
박순자는 이를 견디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가족과 열성신도들 31명과 함께
용인에 있던 오대양 생산공장의 천장에 숨어살게된다.
그리고ㅡ
<사건이 일어난 오대양 용인공장 식당건물>
1987년 8월 29일.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의 (주) 오대양 생산공장
오대양의 직원이었던 김모씨는 서류전달차 용인의 공장에 들렀다가
숙소 식당의 천장이 내려앉아있는 것을 목격하게된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김모씨가 천장 위를 밀어 들여다보자
생전 처음맡는 냄새가 코를 들쑤셨다.
사람 시체냄새였다.
김모씨는 곧장 박순자의 남편에게 알렸고,
이를 전해들은 박순자의 남편인 최모씨가 오후 4시 경 경찰에 신고하여
‘오대양 사건’은 매스컴을 타고 일반에 알려지게 된다.
경찰이 출동하여 시체를 수거하고 현장조사에 착수하였는데
현장에서는 사망한 사람들이 쓴것으로 추정되는 메모들이 발견되었다.
“사장이 독약과 물을 가지러갔다”
“ㅇㅇ도 지금 매우 고통을 받고있다”
“ㅇㅇ가 꿈을 꾸었는데 그곳이 지옥이라고 했다“
“남자는 다 잡혀가고 여자는 다 헤어지고..?$@”
메모의 내용으로 추측하건대 집단으로 독약을 먹고 중독사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으나
부검결과 독극물은 검출되지 않았고, 신경안정제 성분인 ‘하이드라민‘ 만이 검출되었다.
멀미약과 신경안정제를 섭취한 후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목이졸려 죽었다는 것이다.
시체 부검과 현장 감식을 통해 경찰이 추측한 경과는 다음과 같다.
첫번째. 박순자가 신도들에게 약물을 투여, 혼수상태로 만듦
두번째. 박순자는 오대양 공장장인 이경수에게 자신을 목졸라 죽이도록 지시
세번째. 이경수와 남자신도들이 혼수상태인 여자신도들을 목졸라죽임
네번째. 남자들은 여자들이 모두 죽었는지 확인, 박순자의 두 아들이 철골에 줄을 매달고 목매어 자살
다섯번째. 이경수는 두 아들이 죽었는지 확인, 목을매고 자살
<시신을 현장에서 꺼내 운반하는 장면>
결과적으로 박순자와 사이비종교가 만들어낸 비극적인 해프닝으로서
경찰은 이들의 사망 사유를 ‘자살’로 결정짓고 수사를 종결시켰으나
이들이 어째서, 어떤 경위로, 왜 집단적으로 자살하였는지는 밝혀진 바가 전무했다.
단서는 적었고 사건의 실마리를 갖고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오대양 직원 11명은
집중수배되었으나 잡히지 않았다. 결국 사건은 유야무야 종료되었고ㅡ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91년 7월.
사건당시 수배되었던 오대양직원 6명이 경찰을 통해 자수하였다. (어째서 4년이 지나서야 자수를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밝혀진바가 없다)
이들을 통해 오대양의 총무였던 노순호, 기숙사 가정부 황숙자, 육아원 보모 조재선 등은 이미
사건 발생이전에 규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신도들에게 살해, 암매장당한 사실이 드러났고
자수내용을 토대로 대전지검의 오대양사건 재조사가 추진되었으나
별다른 정보를 찾아내지 못하고 4년전과 마찬가지로 ’32명의 집단자살’로 결론,
수사를 종료시켰으며
2013년 현재에 이르러서도 ‘오대양 집단 변사사건’은 때아닌 32명의 자살로서 기록되어있다.
[기타 의문점]
#1. 이경수
-경찰에 추측에 의하면 이경수는 가장 마지막에 목을 매달아 자살
그러나 시신발견당시 이경수는 무릎을 꿇은채 부자연스러운 상태 로 목이 매달려 죽어있었음
이경수의 발 밑에는 갑판이 있어 체중으로 목을 지탱할 수 없었으므로 자살이 힘듦
#2. 여자 시신
-국과수 검사결과 여자 신도들의 사체에서 정액 양성반응이 나타남.
부검의는 국과수의 검사가 오류라고 반박.
#3. 5공특위
-당시 6월 항쟁이후 발생한 사건으로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킴.
오대양의 채권자는 270여명이었고, 이들에 의해서 5공특위에 오대양 사건을 조사해달라며 국회에서 청문회까지 열렸으나 무산. 때문에 언론에 의한 오보, 과장보도가 잦았고 이것이 정치적으로도 이용되기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