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대천 어린이 연쇄실종 피살사건 (1991~1994)
어렴풋 들어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피리소리로 마을에 들끓던 쥐떼를 쫒아낸 사나이가,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자 마을의 모든 아이들을 끌고 산으로 가서는 이후로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이야기.
마을의 모든 아이들을 모았건대 이를 모두 먹여살릴 여력이 피리부는 사내에게 있을리 없으며 보복이 목적인즉 그러할 마음도 없었을 것이다. 곧, 사내를 따라간 아이들은 몽땅 죽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문제는 왜 하필 아이들을 데려갔느냐 하는 것이다, 분명 보상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어른이며, 아이들은 그 어른들의 애꿎은 식솔들일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이야기의 교훈은 무엇인가?
그 마을의 이기적인 어른을 부모로 둔 잘못으로서 얼굴도 모르는 사내를 쫒아 산으로 가서는 길을 잃고 헤메다 굶주려 죽던가 맹수에게 잡아 뜯기는 고통을 아이들이 감내해야 한다는 것일까? 우리는 이야기의 교훈도, 사내의 목적도 알 방법이 없다.
이십여년 전의 이 사건이 또한 그렇듯이.
사건의 시작은 어이없는 해프닝이었다.
1991년 8월 16일 새벽. 충남 대천시. (현재는 보령시와 통합되어 ‘보령시 대천동’이 되었다)
김영철씨의 아들(생후 2개월된 아기)이 실종되는 일이 발생했다.
한참어린 젖먹이가 사라지자 마을은 난리통이 되었고 마을사람들이 모두 총동원되어 아기를 찾아다녔고 덕분에 10시간만에 아기는 마을 외곽의 논두렁에서 발견되었다. 아기는 약간의 타박상을 제외하면 멀쩡한 상태였다. 결국 이 사건은 잠깐의 해프닝으로 남게 되었으나 결과적으로 누가 혼자선 움직이지도 못하는 아기를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논두렁에 갖다놓았는 지는 알 수 없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6개월이 지난 1992년 2월 16일.
김영철씨와 같은 마을에 살던 가민택씨의 생후 15일된 아기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또다시 마을 사람들은 경찰과 함께 마을주변을 이잡듯 뒤졌고 몇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아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2월초의 겨울날씨였고 생후 보름밖에 되지않은 아기가 몇 시간씩 노출되어서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아기는 장시간 영하의 날씨에 노출된 후유증으로 폐렴등의 합병증에 의해 곧 사망하고 말았다.
가민택씨의 집은 김영철씨의 집과 불과 200M 떨어진 곳에 있었다.
경찰은 이를 동일범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연쇄범죄의 기미를 발견하였으나
비밀수사 원칙을 고수하였고, 사건발생 사실을 극비로 부치며 수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마을에 변변찮은 CCTV조차 없었고, 증거도 단서도 전무했던 탓에 사건은 유야무야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두번째 사건이후 4개월 여가 지난 6월 4일.
김영철, 가민택씨와 같은 마을에 사는 유정덕씨의 딸 (생후 4개월)이 실종되었다.
수사끝에 아기가 발견되었으나 온몸에 심한 타박상을 입은 상태였으며 병원으로 옮겨 치료하는 중에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나 여전히 범인에 대한 단서는 실오라기 하나 발견할 수 없었으며
경찰은 비공개 탐문수사에만 소수의 인력을 투입할 뿐이었다.
유정덕씨의 집은 가민택씨의 집과 고작 100M 떨어진 곳에 있었다.
<모든 범행대상은 언어능력이 없는 영아였다. 네번째 사건까지는>
세번째 사건으로부터 3개월 여가 지난 9월 8일. 네번째 영아 실종사건이 발생한다.
같은 마을의 김영배씨의 집에서 산후조리를 하고있던 산모의 딸 (생후 6일)이 사라진 것이다.
또 다시, 경찰과 마을사람들은 함꼐 아기를 찾았으나 끝내 이 아기는 찾을 수 없었다. (생사불명)
여전히 경찰은 비공개수사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앞서 일어난 네번의 사건중 단 한건의 사건조차 해결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일련의 사건들은 터무니없게도 다섯번째 사건이 발생하고나서야 비로소 수면위로 떠오르게 된다. 김영배씨의 집은 유정배씨의 집과 100M가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시간은 흘러, 첫번째 사건으로부터 정확히 3년이 지난 뒤인 1994년 8월 16일.
같은 마을에 있던 한 식당의 뒷논에서 5살난 여자아이가 옷이 모두 벗겨진채로 죽어있는 것을 논 주인이었던 조병수씨가 저녁 6시경 발견하여 경찰에 신고했다.
죽은 여자아이는 같은 대천동의 주민이었던 김영환 씨의 딸 김수연(5)양이었다.
사체는 옷이 몽땅 벗겨져있었고, 배에는 예리한 칼로 찔린 상처가 두개 있었다.
수연양의 시체가 발견된 논은 본 마을에서 1KM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고,
5살난 여자아이가 쉽게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경찰은 마땅한 부검의가 없었던 까닭에 사체 발견후 사흘이 지나서야 수연양의 시체를 부검하기 시작했고, 검시결과 직접적인 사인은 목을 조른 것이었으며 수연양이 질식해 숨이 끊긴 후에 예리한 흉기로 배를 갈라 간의 일부를 적출하여 어딘가에 버린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이 간의 조각은 사체 발견 10일후, 사체가 발견된 논에서 불과 2M 떨어진 농수로에서 발견되었다. 다섯번째 사건은 영유아 실종이 아닌 5살배기의 보행가능한 여아였으며, 그 범행방법이 당시로서는 너무나 끔찍한 것이었던 탓에 언론에 대서특필 되었고 곧 앞선 4번의 영아 실종사건 또한 일반에 알려지게된다.
일련의 사건이 일반에 공개되자 경찰은 부득불 공개수사를 진행하게 되었고, 인근 주민의 제보를 바탕으로 사체 발견당일 논 근방에서 과도와 여자스타킹, 면장갑을 지닌채 주위를 배회하던 이종대(34)를 용의자로서 붙잡아 조사한다. 또한 인근의 정신병자와 난치병 환자를 중심으로 용의선상을 잡고 수사에 착수한다.
(당시 난치병 환자가 살아있는 사람의 간을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속설이 있었다)
곧 수연양의 집 근처에서 혈흔자국이 발견되어 감식에 들어갔으나 사건과는 관계가 전무한 흔적으로 드러났다.
용의자 이종대 또한 사건과 접점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고 뚜렷한 증거조차 찾기 어려워 훈방조치되었다.
그리고 수사는 이렇다할 성과없이 종결되었고 2009년, 마지막으로 일어났던 5차사건의 공소시효가 만료됨으로서 5명의 영유아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죽은 다섯차례의 일련의 사건은
ㅡ2013년 현재,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아있다.
[기타 의문점들]
# 1. 대천동
당시 사건이 발생한 충남 대천시 대천동 (현재 보령시 대천동)의 구시부락은 대천 하천과 장항선 철로를 사이에 두고 허름한 주택이 모여 구성된 빈민촌이었다. 도합 2천여가구로 추정되는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으며 대부분 막노동이나 소규모 장사를 하며 월세살이를 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빈민촌의 특성상 주민의 이사가 잦고 서로 이웃에 대한 정보가 없으며 대부분 단층 건물로 현관문이 허술하여 외부인의 침입을 막기 어려웠다. 담당 경찰서는 한곳도 없이 마을 청장년으로 이루어진 자율 방범대만이 이곳의 치안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 2. 사건 발생 장소
3년에 걸쳐 일어난 모든 사건들이 대천동 안에서 일어났다. 실제로, 사건이 발생한 모든 구역을 표시하여 원을 그리면 원의 반경이 300M가 채 되지않을 정도로 집중된 지역에서 발생한 것이다.
# 3. 다섯번째 사건
1차 사건 : 김영철씨의 아들 (생후 2개월) – 생존
2차 사건 : 가민택씨의 아들 (생후 15일) – 사망
3차 사건 : 유정덕씨의 딸 (생후 4개월) – 사망
4차 사건 : 김영배씨 자택의 산모의 딸 (생후 6일) – 생사불명
5차 사건 : 김영환씨의 딸 (5살) – 사망, 장기 적출(간 일부)
보다시피, 1~4차 사건의 경우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는데
첫번째. 범행대상이 생후 6일~4개월의 언어구사능력이 없는 영아였다.
두번째. 모두 보령 시내의 ‘같은’ 산부인과 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다섯번째 사건의 피해자였던 김수연 양의 경우 미숙하게나마 언어구사가 가능했고 비교적 덩치가 큰 아이였으며 결정적으로 유괴된 그날 수연양이 자던 방안에는 1살배기 남동생이 있었는데도 굳이 5살이나 되는 수연양을 잡아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1차 사건(1991.8.16)과 5차 사건(1994.8.16)의 시차가 정확히 3년이라는 점과 같은 마을에서 일어났다는 점으로 연쇄 실종 살인사건의 일부로 남게 되었다.
# 4. 김수연 양의 유괴경위
김수연양의 집은 매우 비좁아 가족 4명이 모두 누우면 발 디딜틈도 없는 상태였고, 또한 수연양이 덩치가 큰 5살짜리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범인이 이를 데려가는데 가족 모두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 5. 범행동기
사건이 발생한 구시부락은 빈민촌으로 수연양의 집안에 금전을 노리고 올 일은없었다, 그렇다고 장기적출이 목적이라고 하기엔 정작 떼어간 부분은 3 x 4cm 크기의 간 일부였고 이는 사체 발견현장에서 2M떨어진 농수로에서 이물질로 추정되어 발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