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압주의>
‘판옵티콘’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상대방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상대방은 나를 볼 수 있는 원형감옥.
이는 시각 정보의 비대칭이 하여금 행동의 부자유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오늘날에야 사방에 설치되어있는 CCTV 때문에
범죄의 사각이란 크게 줄어든 추세지만
단 몇십년 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순식간에 일어나는 범죄의 경우에서
현장을 온전히 포착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당시 조두형군의 사진필름>
1962년 9월 10일. 서울시 마부구(오늘날의 마포구) 공덕동에 살던
조두형 군(당시 4세, 1959년생)은 8시 30분 경 자택에서 약 200m 떨어진 국민학교로
등교하던 누나를 따라 집을 나섰고, 오전 9시 경 또래친구 이정섭 군과 어울려 놀다 행방불명되었다.
이후 소식이 없자 조두형군의 부모는 경찰에 신고하였는데 처음엔 두형 군이 길을 잃은줄 알고
미아신고 후 다음날인 9월 11일 신문에 후사금 2만원(오늘날 약 500만원)을 걸고 광고를 냈다.
신문광고를 낸 당일 오후 7시 경, 용산에 거주하는 한 여성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는데,
그 여자는 두형이의 인상착의를 물어보고 전화를 끊었으며
다음날인 9월 12일 아침 9시에 다시 전화를 걸어
“우리집에 있는 아이가 틀림없는 두형이다. 계속 울어대서 귀찮으니 데려가라”
고 전했으나 이후 연락이 두절되었다.
당시로서는 위치추적 또한 불가능했던 탓에 찾아갈 수도 없었다.
<당시 자택에 도착한 협박장>
신문광고를 낸지 사흘만인 9월 13일. 정오 부근에 조두형 군의 자택에 협박장이 도착했다.
협박장에는 서대문 우체국의 소인이 찍혀있었으며, 내용인즉
“아이를 찾으려면 협상하자. 현금 20만원을 준비않으면 본의아닌 비극이 생길 것이다”
다음날 9월 14일, 두번째 협박장이 도착했다.
“현상금 20만원을 건다고 광고를 내라. 안들으면 비극을 전할 것이다”
두형군의 부모는 협박장의 내용대로 이행했고, 다음날에는 또다시 세번째 협박장이 도착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6일 오후 5시까지 장위동 경원선 구일(九一)호 전신주 앞에 돌을 쌓아두었으니 20만원을 갖다두어라. 아이는 십시간 후에 돌려보내겠다”
이에 경찰은 가짜돈을 놔두고 대기했으나 아무도 오지않았고
19일과 22일에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계속되는 괴전화와 허위제보로 인해 인력과 자본이 낭비되었고,
경찰은 이두형 군이 유괴당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이유는 첫번째, 광고나 신문기사를 보고 돈을 떼먹으려던 범인이 둘이나 잡혔고
두번째, 편지를 보낸 소인이 서대문, 영등포, 청량리로 각각의 필적이 모두 다른것.
세번째, 진짜 유괴범이라면 이미 현상금을 건 상태라 협박을 하지않고도 돈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조두형 군을 찾기위한 대대적 캠페인이 열리기도 했다>
당시 4살짜리 아이를 돈때문에 유괴한다는 것은 충격적인 사실이었고
때문에 언론을 포함한 각종 매체에 두형 군을 찾기위한 범국민적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내무부, 체신부, 문교부, 한국전력, 여성 단체들까지 두형군을 찾기 위해 애썼다.
<대국민 담화를 하는 박정희 대통령>
거국적 수사에도 조두형군의 행방파악에 진전이 없자 박정희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하는데까지 이르렀다.
“조두형 군을 유괴한자는 한시빨리 자수하길 바란다. 자수하여 아이가 무사히 돌아온다면 관대한 처분을 내리겠다.”
더불어 당시 내무부장관이었던 박경원에게 두형군을 찾기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말라는 특별지시까지 내렸으나
단서부족, 허위제보 속출 등의 이유로 수사에 난항을 겪은 끝에
조두형 군은 영영 찾아내지 못했다. 행방도, 생사도 알지 못한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