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본위제도는 영국을 중심으로 독일을 비롯한 북유럽을 거쳐 프랑스, 미국을 통해 전세계의 통화체계가 되었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의 태양처럼 금본위제는 영원할 수 있을까요?
1914년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대낮에 울린 총성으로 금본위제에 위기가 찾아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암살. 바로 1차 세계대전의 시작입니다.
1차 세계대전의 참전국들은 금본위제도를 이탈하게 되었습니다.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보유한 금보다 많은 화폐를 찍어내었고 금 생산량이 화폐 발행속도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죠.
돈의 가치는 하락하며 인플레이션이 찾아옵니다.
유럽국가들이 미국에게 전쟁물자를 수입하는데 대가는 금으로 지불한 결과
미국은 전세계 금의 40%를 보유하게되며 자연스러운 달러의 팽창으로 전쟁 이전보다 물가가 2배가 뜁니다.
독일 어느 길가에 버려진 돈. 아니 쓰레기를 치우는 모습입니다.
유럽 참전국들은 자국 금은 미국으로 유출된 상태에서
보유한 금보다 더 많은 화폐를 찍었기에 미국보다 더 심한 인플레이션을 경험합니다.
1913~1919년 사이 영국의 물가는 2.5배, 프랑스는 3배, 독일은 8배까지 올랐습니다.
패전국이었던 독일은 하이퍼인플레이션까지 경험하게 되죠.
종전 이후 세계 각국에서는 그동안 풀었던 유동성을 회수하기 시작합니다.
금본위제도를 되살리기 위한 첫 시도였습니다.
너도나도 자국의 인플레이션을 잡는 것에 혈안이 되어 타국은 신경쓰지 않고 유동성을 회수한 결과
무역이 마비되고 자금의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1929년 하반기 통화긴축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1929년 10월 28-29일. 다우존스 지수는 이틀간 23% 폭락하였습니다.
대공황의 시작입니다. 3년만에 미국 시가총액의 90%가 증발합니다.
인플레이션보다 지독한 디플레이션의 끝은 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 되었죠.
반복되는 세계대전을 통해 미국은 전세계의 금을 흡수하게 되는데, 해당 내용은 1편에서 다루었으니 넘어가겠습니다.
1944년, 잊혀졌던 금본위제가 부활하게 되는데요.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튼 우즈에서 44개국이 참가하는 연합국 통화 금융회의가 열립니다.
1차세계대전>대공황>2차세계대전
말그대로 당시 세계경제는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죠.
이를 바로잡고자 통화체계에 대한 개편을 논의하기 위해 전세계가 모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스는 전세계의 화폐를 통일하자 주장하였으나 거부되었고
미국 재무부의 해리 덱스터 화이트의 미국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미국중심의 금본위제도]가 채택되죠.
브레튼 우즈 회의에서 탄생한 이 제도는 그 이름을 따서 브레튼 우즈 체제가 되었습니다.
해당 내용은 이렇습니다.
1. 금 1온스를 35달러로 고정, 그 외에 다른 나라의 통화는 달러에 고정.
2. 환율은 원칙적으로는 상하 1% 범위 내에서 조정이 가능 (국제수지의 근본적인 불균형이 있는 경우 예외)
3. 각국에 필요한 외화를 공급하는 국제통화기금(IMF) 창설, 특별인출권 창출(회원국은 담보 없이 외화 인출 가능)
4. 전쟁 후 부흥과 후진국개발을 위한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을 창설
가장 중요한 것은 금은 오직 달러와 교환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미국중심의 금본위제가 가능한 이유는 미국이 전세계 금의 80%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달러만을 금과 연동시킴으로서 미국은 금본위제, 전세계는 달러본위제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죠.
기축통화. 달러 역사의 시작입니다.
이제 금을 갖고싶다면 미국에 달러를 갖다 바쳐야하는 것입니다.
전세계는 국제거래를 위해 금뿐만 아니라 달러까지 비축해둬야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금본위제는 달러를 돈의 왕좌에 앉혀주면서 영국 파운드화의 패권이 달러로 이동하게 된 것이죠.
금본위제와 달러. 둘의 동행은 어디까지일까요?
다음시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