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뮌헨 올림픽 테러를 알아보자
올림픽은 세계인의 축제이자 세계인들이 한자리에서 어울리면서 정정당당한 승부를 펼치는 무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올림픽에서 때아닌 테러가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다른때도 아닌 하필 전세계의 축제인 올림픽때 터져서 그래서 더더욱 기억되고 있는 테러
1972년 뮌헨 올림픽 테러를 알아보자
화려함 속에서 개막한 올림픽 그런데..
72년, 서독(현 독일)의 뮌헨은 전세계인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바로 뮌헨에서 열리는 제 20회 하계 올림픽 때문이었다.
당시 서독은 2차대전 전범국과 전쟁 후유증에서 벗어나면서 라인강의 기적이란 이름으로 눈부신 성장을 할때였었고 경제성장과 함께 생활도 예전보다 많이 나아진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나라 안에서는 경제 상황과 대비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바로 68혁명으로 인한 후유증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1967년 이란 국왕의 서독 방문을 반대하는 집회도중 총탄에 맞고 숨진 대학생의 죽음이 알려지면서 발생한 독일 68혁명(프랑스 68혁명과 다름)은 모순과 부조리로 얼룩진 서독사회를 비판함과 동시에 그간 발생한 모든 것들이 표출된 혁명이어서 이었는데
문제는 혁명 이후 좌파 세력의 확산과 활동이 과감해지고 이로 인한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는 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독일 적군파까지 등장하면서 서독은 때아닌 좌파세력들로 인해서 나라가 시끄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독은 올림픽 개최에 대한 열망을 잊지 않았고 72년 뮌헨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72년 8월 26일, 성대한 개막식과 함께 개막을 선언하였다.
이후 올림픽은 차질없이 진행되었고 폐막일인 9월 11일까지 순조롭게 가는듯 싶었다.
그런데..
폐막을 불과 6일 앞둔 9월 5일 새벽 4시, 운동복을 입은 정체를 알수 없는 8명의 무장괴한들이 올림픽 선수촌에 들이 닥쳤다.
이들은 담장을 넘어서 한 숙소로 집중적으로 향하게 되었는데 그 숙소는 바로 이스라엘 선수들이 묶은 숙소였다.
무장괴한들의 침입 소식에 자다 깬 이스라엘 선수들은 황급히 자리를 피했지만 이중 9명(2명 사망)은 괴한들에게 잡히면서 인질이 되고 말았다.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뮌헨 올림픽 테러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쉽지않은 협상과 완전 개 민폐끼친 언론사들, 게속 위기를 야기시키다
소식이 알려지면서 서독 정부는 충격에 빠졌다.
특히 올림픽에 최우선 노력을 한 서독 올림픽 위원회는 아예 멘붕에 빠지고 만다.
우선 테러범들이 올림픽 선수촌에 난입 할 수 있었던건 허술한 보안과 테러범 중에는 경기장 공사를 맡은 애들도 있었다.
경쟁도시들을 제쳐가면서 까지 어렵게 개최한 올림픽이었는데도 이런 사태가 발생했다는 사실에 그들은 더 큰 충격을 먹을수 밖에 없었던 거였다. 이에 서독 정부는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하였고 일을 풀기위한 면모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시작은 서독 경찰이었다.
경찰측은 협상을 하면서 인질범들의 요구 사항 및 기타 정보들을 얻기 시작하였다.
얻어낸 정보들은 크게 두가지였다.
1. 이번 테러를 일으킨 테러범들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인 ‘검은 9월단’ 소속이다
(여기서부터는 테러와 테러범으로 통일)
(참고로 검은 9월단의 이름 뜻은 아랍계 게릴라가 요르단 정부군의 토벌작전으로 죽은 1970년 9월을 의미한다)
2. 이스라엘에 억류된 팔레스타인 동료들을 석방하라
두가지로 밝혀진 정보들은 실시간으로 언론을 통해 보도 되었고 세계인들은 올림픽이 아닌 올림픽 도중 일어난 참혹한 테러에 모든 시선을 집중시켰다. 서독정부도 그걸 알았는지 즉각적인 자세를 취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였지만
쉽지가 않았다. 먼저 협상 나선 서독 경찰은 협상을 하자마자 말도 제대로 못맞춘채 끝나버렸고 이에 맞춰서 나오려는 진압작전도 아예 하지도 못하였다고 하는데 그중 특수작전 부분은 서독 경찰에게도 사건이 발생한지 41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가장 말이 많은 부분이라 할수 있는데 이유는 바로
언론들 때문이었다.
당시 언론들은 사건 발생 직후 선수촌 아파트 주변에서 뜨거운 취재열기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시시각각 테러범들을 직찍하면서 최대한 얼짱각도로 잘나온 사진들을 기사화 시켰다.
실제 진압작전 모습
이러한 취재열기 탓에 경찰들이 계획했던 진압작전도 생중계로 방송된 방송카메라에 그대로 노출되었고 이것을 본 테러범들이 눈치를 채면서 진압작전은 해보지도 못하고 실패하게 된다.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줄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언론들이 놓치게 만든것이었다.
거기에 군경도 문제였었다. 군인들은 민간대테러진압작전에 참여하지 못하는 구조였고 경찰들은 대테러 훈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아 일반 소총을 잡는것조차 어색했다. AK소총의 특성을 파악하지 못한 뮌헨 경찰서장은 작전에 헛점을 유발했고
테러리스트가 얼굴을 가린다는것은 자신도 생존을 바란다는 의미였지만 그런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작전을 짜는 과정역시 대테러전문가나 협상,심리 전문가가 아닌 독일 총리와, 뮌헨시장, 전에 실책을 낸적이 있던 뮌헨경찰 서장 셋이서 작전을 짜니 애초에 작전이 잘될리가 없었다.
테러범들을 죽었지만 돌아온거라고는 9구의 시신들이었다
이처럼 난해한 방식(?)과 민폐를 끼친 언론들 때문에 엄청나게 빡친 서독정부는 결국 테러범들의 요구를 들어주는척 하면서 뒷통수를 때리는 방법을 시전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방법은 다음과 같다.
테러범들을 헬기로 인근 공항까지 이동시킨 후, 다음 목적지까지 이동할 비행기안에
경찰들을 승무원으로 위장해서 저격수와 합동하에 완전히 사살하는 방법이었다.(물론 인질들도 포함)
사실상의 종지부를 찍으려는 방법이자 장기화를 우려한 서독정부의 판단하에 나온 방법이라 서독정부는 이 작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옥이 펼쳐졌다.
공항에는 전혀 훈련을 받지 못한 일반 경찰들이 저격용 소총도 아니고 스코프도 없는 일반 HK G3 전투소총을 들고 나왔다.
평화통일 모습을 보여주지 않겠다고 군대를 투입 시키지 않고 체면치례하다가 큰 값을 치른다.
당시 시간은 밤이었고, 그 소총은 야간사격과 저격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아무튼 헬기가 도착해서 착률했는데 평소대로 하면 될것을 방향을 반대로 잡았다. 평소처럼 세로로 착륙했으면 헬기 양쪽에 배치된 경찰들이 쏘면 되는데 가로로 착륙했다.
설상가상으로 전달 받지 못한 항공사측에서는 안전용라이트를 켜게 되는데 그 빛이 탑에 매복해있던 경찰들의 시야를 막아버린다. 나머지 경찰들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상황이라 아군사격의 위험이 있어 함부로 쏘지도 못했다.
그래도 아직 경찰 한명이 차량 옆에서 조준하고 있었는데 이마저도 무전이 안되서 명령이 내려오지 않는다.
내린 직후 저격하기로 했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기회는 있었다. 테러리스트들이 탑승하기로 했던 비행기에는 승무원으로 가장한 일반 경찰들이 있었다.
이들은 작전을 충분히 숙지했고, 테러범이 모두 탑승 했을때 제압하기로 했다. 하지만 테러범들이 오기전에 자기들끼리 나누던 대화에 테러범이 비행기 내에서 수류탄을 던지면 우리 모두 죽는다. 이렇게 위험한 작전을 수행 할 수 없다면서 자기들끼리 투표를 하고 철수를 해버린다.
그리고 테러범들이 비행기에 올라가보니 뭐가 이상한거다.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테러범이 함정이라고 외치면서 외치면서 테러범이 헬기로 도망가자
무전 안되는 경찰은 왜 발포명령을 안내리지 혼자 고민하다가 발포를 해버리고 테러범도 맞대응 한다.
처음에는 지원병력과 경찰들의 공격으로 진압되나 했었는데 결국 테러범들은 인질들이 타고 있던 헬기에 수류탄을 던져버리고
모든것이 끝나버린다.
41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어진 후유증.. 교훈과 GSG-9의 창설을 알리다
병신스러워도 참 병신스러운 짓이었다. 무엇때문인지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계획이 취소됨과 동시에
탑승한 테러범들이 빈 비행기인것을 눈치 깐후 현장에 남은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였고 총격전끝에 테러범들을 사살하거나 생포하면서 길었던 테러극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발생한지 18시간만의 일이었다.
진압작전은 성공(?)했지만 나머지 인질 9명은 안전은 커녕 다시 돌아오지도 못한채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테러는 그렇게 비극적으로 끝나게 되었다.
테러 이후, 충격파는 어마어마했다.
세계인의 축제로 자리매김한 올림픽에서 벌어진 테러라는 점에서 충격을 먹은것도 있지만
안일한 서독 정부의 대처와 올림픽을 이용한 테러였다는 것을 보더라도 충격파는 큰 후유증을 야기시키면서 뻗어가고 있었다. 이때문에 일부에서는 어렵게 개최한 올림픽을 남은 일정과 관계없이 바로 포기하자는 의견까지 나왔지만
한번 개최한 올림픽을 포기하기에도 아닌것 같다고 느껴진 서독정부와 IOC가 계속 진행하는걸로 하면서 올림픽은 계속 하게 되었지만
경기는 사건 발생 직후 바로 취소되었고 피해를 본 이스라엘 선수단을 남은 경기와 상관없이 동료들의 주검을 가지고 이스라엘로 돌아갔다. 또한 사건후 열린 올림픽 경기에서도 조기가 계양되는등 여러므로 큰 후유증을 겪게 되었다.
여러 말들도 이어졌다.
테러가 비극적으로 끝난 부분에 대해서 일부 사람들은
‘정보력을 제대로 파악못하고 안일하게 대처한 서독정부의 탓’ 이라고 하면서
서독정부의 잘못을 주장하였다.
실제로 서독 정부는 테러범들의 추가 정보를 캐내는데 실패하면서 한계에 가까운 정보력에 의지하였고
대테러 개념이 없던 터라 진압관련한 전문가도 없었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된 모습을 보이기가 힘들었었다.
이러한 이유로 서독은 대테러부대이자 지금까지 널리 알려진 부대인 GSG-9을 창설하였고 현재까지 GSG-9은 세계적인 대테러부대로써의
이름을 유지하면서 대테러 부대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지만
41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 사건은 현대의 테러리즘을 알린 본격적인 사건으로 그 이름을 이어가고 있다.
뒷 이야기
1. 이사건 이후 최대 피해국인 이스라엘은 ‘신의 분노’라는 이름의 보복작전을 펼쳤고 이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을 야기시키기도 했다.
‘모사드, 국가안보를 위협한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
이것은 영화 ‘뮌헨’으로 만들어졌다.
2. 경기는 추도식 이후 34시간이 지난뒤에 다시 재개 되었다.
3. 정보력 부족 탓에 테러범들의 인원조차 파악하지 못한 서독 경찰은 4~5명일꺼라는 추정을 내세웠지만 진압작전을 하고나서야 테러에 나선 테러범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고는 크게 반성했다고 한다 참고로 얘네가 엄청 믿어왔던 정보력이라고는 협상팀의 증언이었다고 한다.
4. 뮌헨 경찰서장은 이스라엘 정부로 부터 답변을 요구하는 자세를 취했고 이스라엘 정부는 ‘한명도 살려주지 말고 어떠한 협상과 타협이 없다’ 골다 메이어 당시 총리의 말을 인용해서 그대로 전달하였고 그들을 진압하는 작전을 취하게 되었다고 한다.
5. 참고로 사건이 발생한 이스라엘 숙소 바로 옆에는 우리나라 선수들 숙소가 있었는데 다행히 화를 면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