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착왜구의 시작 일진회에 대해서 알아보자
그들이 좋아하는 토착왜구의 정의를 내리자면 1904년 동학농민운동이후 세력들이 만든 악질 친일파 일진회 후손으로 꼽을 수 있다. 의병을 죽이고, 관직을 독점하고 후손들은 지금의 학계를 점령하였다. 한일합방청원을내며 한일합방에 공이 크며, 보상으로 일제때 관리와 대지주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이들이 반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토착왜구라고 악을쓰는 모습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다. 역사 공부를 하다보면 대부분의 역사책은 당시 사회적 상황과 배경, 경과, 영향등에 대해서 구체적인 숫자와 자료를 제시 못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사실에 기반한것이 아닌 민중사관, 민족사학이 비논리적으로 한국 사학을 점령한지 오래이며 이들이 다루지 않는 일진회에 대해서 말해볼려고 한다.
풀뿌리 거대 친일파 일진회 결성 (1904.08)
일진회 토착왜구 씨발놈들은 처음부터 일한합방을 목표로 일본 정한파 및 낭인과 내통했다.
회원은 최대 130만명이다.
북진수송대 14만명 (1904.10 -1905.10)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위해 경의선 철도건설, 물자수송, 정탐, 전투 참여 등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
대가로 돈과 토지를 받고 면서기, 면장, 읍장, 군수등의 관직을 독점한다.
일진회 선언서 – 외교권 이양 주장 (1905.11)
을사보호 조약 10일전 조약의 당위성을 전국 국민에 선전했다.
고종 양위 시위 (1907.07)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매일같이 고종 물러나라는 시위를 하였으며 결국 순종에게 양위했다.
정미의병 진압, 학살 (1907.07-1909.12)
의병을 진압한 주세력은 사실 일본군(130명 전사)이 아니고 일진회 원호대원(1250명 전사) 이었다.
2년 동안, 의병 16,700 명이 학살당했고 36,770 명이 부상당했다.
일진회가 일본군과 같이 의병을 진압, 학살하며 기념으로 남긴 사진이다.
전국에 있는 의병들과는 장비, 보급, 작전 운용등에서 수준이 달랐으며 사실상 일방적인 학살이다.
일본 다이쇼 황태자 환영행사 (1907.10)
일본 왕자 받들어 모신다고 남대문 앞에 대형 아치를 건축했다.
국시유세단 운동 1909.8.29 – 1910.8.29 (합병 유세 운동)
일본하고 합병하는 게 좋은 거다 라고 전국에 시위를 하고 다녔다.
일한합방 청원운동 – 100만명 서명 (1909.12)
대세는 넘어 갔으니 합방하라고 100만명 서명해서 순종에게 던졌다. 거기에 일본 통감에게도 빈다.
순종에게 일본말로, 좋은 말할 때 일본에 넘기라고 협박했다.
일진회 초기 회원 분포 현황 (1904.12) – 특정 지역 누락
(출처 : 조선통감부 기록 DB)
일진회의 회원은 대부분 동학교도 였다.
당연히 1,2차 동학봉기의 주축인 남접 지역 토착왜구 회원이 많았다. 사면된 이후에도 지역 아전, 관군, 양반들의 보복이 두려워서, 초기에는 그림처럼 명부에 기록도 누락하고, 철저하게 숨겼다.
동학 남접이 주도한 1,2차 봉기 때, 강원도/경상도의 동접은 대부분 불참했다.
동접은 남접의 반란을 비난했고, 동학을 탈퇴하는 자가 다수였다.
북접도(충청도) 무장 봉기에 소극적이다가 2차 봉기에 일부 합류했다.
위의 1904년 기준 회원 구성에서 북한지역이 회원이 많은 이유는, 동학에 대한 반감이 적었고, 1895 공주패전 이후 검거와 탄압을 피해 북한 지역으로 이주하여 포교했기 때문이다.
또한, 북진수송대 경의선 부역을 하며, 경기, 북한지역으로 이동하여 등록하고 회원 활동을 한 요인도 있다.
명부에 오른 부역자에게 일진회가 수당을 지급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