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전범지원국이었다. 이 명제에 대해서 논쟁하고자 하는것이 아니라.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내걸고 패망한 직후 연합국은 조선을 사실상 전범지원국으로 분류를 했다. 일본 영토내의 한 지방으로 인식되어 일본과 묶여서 함께 처벌 대상이었다. 만주국 처럼 말이다.
(세계 2차대전 독일-오스트리아 관계나 고려시대 몽골간섭기 시절 여몽연합군과 유사)
이 말을 처음 들으면 나보고 친일파라거나, 토착왜구니 뭐니 하겠지만 분노하는 것이 당연하다.
감정적으로 따지지 말고 나는 조선이 전범지원국이라고 주장하는것도 아니다.
연합국이 그렇게 분류했다. 왜 조선은 전범지원국으로 분류됬고, 어떻게 그냥 넘어갔는가 말하고자 한다.
팩트? 연합국최고사령부 지령(SCAPIN) 1757호를 보자
https://dl.ndl.go.jp/info:ndljp/pid/9887025
미국은 1947년 연합국최고사령부 지령(SCAPIN) 1757호를 통해 한국을 특별 상태국으로 정의하였다.
연합국, 중립국, 적성국의 세 범주에 속하지 않는 ‘특수지위국가’로서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태국 등과 함께 ‘조선’을 포함시켰다.
이는 조선이 일본의 과거 식민지로서 당시에는 연합국의 점령 하에 있는 비독립 지역이었기 때문으로 관측된다.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 국가들은 1910년 일본의 한반도 병합을 승인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인정)
“일본의 통치에 대한 한국민의 저항은 제한된 지역에서의 단기간의 소요에 불과했다”(한국의 교전국 지위를 부인)
미 국무부 극동조사국 보고서 – ‘대한민국의 대일강화조약 참가’
연합국에서는 조선의 독립이라고 명시하였지만 그 내막을 살펴보면
사실상 조선을 독립시켰다기 보다는 일본 세력을 쪼개기 위해서 분리 시켰다는 의미가 강했다.
(일본부, 조선부, 대만부, 만주부)
이 글을 쓰는 나도 어이가 없는 대목이다.
연합국의 논리를 따라가보자
조선인 전쟁범죄자는 148명이었다.
연합국의 군사재판에서 심판을 받은 사람 가운데 포로학대 등의 혐의로 처벌받은 BC급 전범 5700명 가운데 984명이 교수형·총살형의 선고를 받았으며, 이 가운데 한국인(조선인) 전범이 148명이고 23명이 처형됐다.
일제 패망이후, 전쟁범죄 처리 과정에서 조선인 전범은 148명이었고 이중 23명은 처형됬다.
– ここでは군인군속だけを計上している。その他의 정의によれば、23명
BC급 전범(BC級戦犯)은 연합국에 의해 선포된 국제 군사재판소 조례 및 극동 국제 군사재판 조례의 전쟁 범죄 유형B 항 ‘보통의 전쟁 범죄’ 또는 C항 ‘반인륜 범죄’에 해당하는 전쟁 범죄 또는 전쟁 범죄가 되는 죄목을 추궁 받은 개인의 총칭이다.
일본의 BC급 전범은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에 의해 요코하마와 마닐라 등 세계 49곳의 군사 법정에서 심판을 받았다.
- B항 : 통상적인 전쟁 범죄 (Conventional War Crimes)는 전시 국제법의 교전 법규 위반 행위(Namely, violations of the laws or customs of war)를 의미한다.
- C항 : 반인륜 범죄 (Crimes against Humanity)는 ‘국가 또는 집단이 일반 국민에 이루어진 살인, 멸족을 목적으로 한 대량 살인, 노예화, 포로 학대, 추방 기타 비인도적 행위’라고 정의되어 있다. 이 법개념에 대해서는 당시부터 찬반 의견이 분분했다. 또한, 이 C항은 일본의 전쟁 범죄로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ABC가 A가 제일 심하고 C가 제일 덜한게 아닌가 착각 할까봐 적어둔다. 그냥 범죄 분류 방법이다.
전쟁범죄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그리고 여기에 조선인 148명이 포함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인가?
일본군으로 자원한 조선인은 73만명이었다
연도 | 지원자 | 입소자 | 선발율 | 지원배수 |
1938년 | 2946명 | 406명 | 16.2% | 7.3배 |
1939년 | 12,348명 | 613명 | 4.9% | 20.2배 |
1940년 | 84,443명 | 3,060명 | 3.6% | 27.6배 |
1941년 | 144,743명 | 3,208명 | 2.2% | 45.1배 |
1942년 | 254,273명 | 4,077명 | 1.6% | 62.4배 |
1943년 | 303,394명 | 6,000명 | 1.9% | 50.6배 |
『朝鮮及台湾ノ現状/1 朝鮮及台湾ノ現況 1 REFCODE B02031284700』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Ref.B02031284700
1938년도에는 400명 모집에 약 2,900명이 지원하였다.
1939년도에는 600명 모집에 약 12,300명이 지원하였다.
1940년도에는 3,000명 모집에 약 84,400명이 지원하였다.
1941년도에는 3,000명 모집에 약 144,700명이 지원하였다.
1942년도에는 4,500명 모집에 약 254,300명이 지원하였다.
1943년도에는 5,330명 모집에 약 303,400명이 지원하였다.
위의 표는 조선인들의 일본군 입대를 나타낸 것이다. 한해 최고 30만명이 넘게 지원하기도 했으며 경쟁률은 최고 62.4:1을 기록하기도 했다.
일본제국시절 일본제국군 조선인 특별 지원병제에 1938년 부터 1943년까지 무려 73만명이나 지원했다.
조선인은 일본군 장군까지 했다.
소위 같은 초급 장교뿐 아니라 장군에 왕족이었던 이은(영친왕)은 일본제1항공군 사령관을 하고 있었다.
중장. 별을 달았다는 것이다. 왕족이라 하지만 조선인이 일본군의 장군이었다.
*광복 이후 이승만은 영친왕의 입국절차를 불허했으며 다시는 한반도로 돌아오지 못했다.
홍사익은 왕족도 아니고 조선의 평민으로 일본군 장군(중장)까지 오른 인물로 중국팔로군과 조선의용군과 교전(태항산 전투) 당시 일본군을 지휘했으며,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필리핀전선에서 연합군포로 수용소장 지냈다. 종전후 필리핀에서 전범으로 처형당했다.(B급 전범)
이병무 : 대한제국군을 거쳐 일본군에 편입됐다. 정미칠적,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주도했으며, 이후 의병 토벌에 진압에 앞장서기까지 했다. 최종 계급은 중장
조동윤, 조성근, 어담, 이희두, 김응선, 왕유식등 대한제국군에서 일본군으로 편입하거나, 일본군으로 자원 입대하였으며 왕유식의 경우 친일파 장교 견제를 위해서 고종이 일본으로 유학을 보냈는데 친일파가 되어 돌아왔다.
군인뿐만아니라 일제 앞잡이 노릇한 공무원, 경찰은 셀수가 없는데
지금의 대통령과 집권 여당 인사인 문재인, 유시민, 홍영표의 집안 역시 일본 훈도 내지 중의원참의직을 엮었다.
정말 광범위하게 친일 인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생계형친일이라고 변명하였지만 결국에는 아니라고 인정했다. 그리고 애초에 생계형이면 봐줘도 되나?)
일본은 한반도에 많은 돈을 투자했다.
또 다른 주요한 이유는 일본은 다른 곳과는(중국,인도) 다르게 한반도에 굉장히 많은 돈을 투자한 사실이다.
위 링크에 자세하게 적어두었으니 여기에서는 길게 언급을 하지 않겠지만 다른 점령지는 말살이 목표였지만 조선은 합병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조선의 피해가 적었다는 것이다.
미국연합최고사령부(GHQ)에 따르면 일본이 한반도에 투자한 인프라의 가치는 그때당시 60억달러라고 추산하였다. (내막은 위에 자세히 적어두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결과로 오히려 일본은 한반도내의 일본재산에 관해서 역청구권을 제시하였다.
위와 같은 복합적인 이유로 2차세계대전이 끝난후 연합국들에 의해 조선은 샌프란시스코 조약 참여를 거절당했다.
연합국 입장에서 조선은 지배받는 한편 독립운동을한 세력이 아닌, 수십만명이 자원 입대를 하고 여러 장군과 필리핀 포로수용소장으로 A급 전범 사형수까지 배출한 부역국이라는점이다.
이것 말고도 미얀마, 대만 여러 전선에서 일본군보다도 악질적이었던 것이 조선군인이라는 증언도 있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한국인은 일본군복을 입고 싱가포르를 함락시킨 침략의 협력자였다.
– 싱가포르 초대총리 리콴유
아니 그런식이면 그래도 우리는 독립군과 광복군이 있었고 의병도 일어났었는데
프랑스도 전범지원국이 아니냐? 비시 프랑스(Vichy France)는 완전 괴뢰국인데??
자유프랑스군은 정규군만 15만명에 독일치하 레지탕스만 20만명이넘었다. 그것도 단일조직이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연합국에 증명할 수 있는 최대 단일 조직중 하나인 광복군은 339명이 전부였다.
창군 당시 광복군의 규모는 정확하지 않으나 약 30여 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1942년 1월 충칭 주재 미국대사관의 보고서는 충칭의 한국 거류민은 200명을 넘지 못한다고 적고있다.
United States Depatment of State,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42, Vol 1
(Washington, D.C: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42) p 858
조선혁명군 양세봉, 김학규는? 일본군과 수 많은 전투가 있었고 요인암살, 군사시설 폭파, 교란작전이 있었는데??
그런데도 조선이 교전국이 아니라고? 왜 광복군만 따지는거야??
많은 의문이 들 것이다.
조선은 프랑스처럼 단일 조직으로 저항한것이 아니라 적게는 수십명 많게는 수천명이 각개 쪼개져서 활동하였으며
심지어 손혜원 부친 유공자 의혹, 문재인 김원봉 그리고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공산주의자가 죽여버린 독립운동가들 (홍범도 장군, 김좌진 장군)
같은 독립군끼리 이념이 다르다고 총질한적도 허다하다. (자유시참변)
정말 만약에 국내진공작전 역시 실리는 둘째치더라도 당위성을 확보 할 수 있었을 건데 임시정부는 내분으로 서로 싸우다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렇게 쪼개진 활동을 연합국은 산발적인 저항이라고 판단한것이다.
*학교에서 역사시간만 어렴풋이 떠올려봐도, 하나의 단일 조직이 아닌 엄청나게 많은 파벌과 독자적으로 행동하였다.
최소한 독립이후 국제사회에 조선의 독립운동, 의병활동을 적극적으로 어필해서 연합국의 판결을 뒤집어 교전국의 지위를 확보해야 하는데 그러기는 커녕 625전쟁으로 준비조차 하지 못했으며 해명할 기회를 놓쳐버렸다는 것이다.
연합국의 임의적인 판단으로 우리는 억울하게 전범지원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에 쓰게될뻔한다.
*여담이지만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한일배상문제가 꼬여버린다.
자세한 것은 위의 글을 참고하면 된다.
교전국의 지위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배상의 차원이 아닌 식민지 국가간 재산정리 였고
이는 일본이 국제법상 조선에 배상을 할 의무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65년 한일 협약에서 돈의 명목은 독립축하금(좀 웃기는 말이지만)과 강제징용 보상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선이 전범지원국의 지위를 벗어 났는데 이는 광복군이 5만명이라는 주장 덕분이다.
그거는 어디서 나온 숫자인데?
이 말의 근거는 사실 없다. 하지만 누가 했는지는 나온다.
이승만이다.
센프란시스코 조약 참여도 거절당하고 조선이 그대로 전범지원국으로 지정되서 처벌을 받게되자
이승만은 미국에게 광복군 총병력이 5만명이라고 강력하게 주장을 하게 되었고
미국은 이승만을 믿고, 전범지원국에서 명단을 빼주었다.
일본의 침공이 있기전 이승만은 재팬인사이드아웃이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일본의 침략을 경고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이내 진주만 공습을 시작으로 정확하게 상황이 돌아가자
미국내에서도 이승만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인지도와 신뢰가 상당히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이승만을 믿고 주장을 받아들였다.
당시 상황이 상황인지라(625전쟁).. 전범지원국이니 뭐니는 따질때가 아니기도 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반쪽자리 성과이기는 하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부터 교전국의 지위를 확보해야 이후 배상 문제에서 유리하게 작용 할 수 있었는데,
나중에 전범지원리스트에서만 빠짐으로 처벌만 겨우 면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늘날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5.20 사사오입(반올림)과 4.19 혁명등으로 인해
안 좋은 이미지만 남기고 조롱거리가 되어 과거의 뒷편으로 사라졌지만,
그당시 발자취를 따라가보면 이승만은 당시 국제정세를 모조리 파악하고 있었으며
미국을 상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승부사기질을 가졌으며,
이후의 세계적인 냉전구도, 미국과의 관계의 중요성 등 모든 것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승만이 튼실히 해놓은 것이 자본주의, 반공노선, 한미동맹을 대한민국의 기초로 삼은 것은 백년을 내다본 혜안이었다.
어쩌다보니 글이 기승전이승만으로 흘러가는데, 전범지원국을 벗어나게된 이유가 이승만을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가 없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조약과 조선의 지위, 배상에 관한글은 위에다가 적어두었다.
혹시 일본군과 치른 전쟁에서 청산리 대첩이 떠오르는 사람이 있을것 같아 적어두는데,
당시 사료에 따르면 규모가 과장되었다고 보면 된다. 일본군 사상이 40명도 되지 않는다.
우리도 일본과 전쟁했다! 라고 주장하고 싶을지 모르겠지만
중국과 인도가 일본과 전쟁한것에 비하면 규모와 피해는 미약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는 산발적인 저항으로 치부 될 수 밖에 없었다.
‘이승만 신격화 할려고 이 글 쓴거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는데
어쩌겠는가? 이게 진실이고 이승만이 그런 사람인데;;;
참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