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토지개혁(농지개혁법)에 대해서 알아보자
일단 한국은 지금은 제조업을 삼는 국가이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광복 직후는 말이다. 광복이전에는 지주와 소작농의 불평등한 관계와 땅을 통해서 계급체계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는데 토지개혁(농지개혁법)은 정말 천지개벽정도로 모든것을 뒤집은 일이다. 북한과 비교해서 이승만의 토지개혁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유상몰수유상분배/무상몰수무상분배 어느것이 더 좋은가?
무상몰수무상분배? 그 내막을 알아보면 그렇게 말하기는 힘들것이다.
토지개혁은 농민에게 균등한 경작권을 주기 위하여 가구당 보유할수 있는 농지를 제한하며 초과된 농지는 다른 농민에게 유상 또는 무상의 방식으로 강제 분배하도록 하는 법률로 1950년대초 집행되었다.
토지개혁이 중요한 이유는 한국보다 경제상황이 좋았던 동남아역시 2차세계대전이후 토지개혁에 실패하면서 계급화가 고착화되어 성장에 걸림돌이 되어 경제성장, 근대화에 실패한 이유가 있다. 필리핀의 경우 정치부호가 아직까지 정재계를 독점하고 있으며 이는 비효율의 극치를 달리지만 지배권은 이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 한국역시 다를바가 없었다.
“한국은 과거 50년대에 농지개혁을 했지만 브라질은 그러지 못했고, 아직도 그것이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브라질의 경제는 사회개혁 없이 심각한 불균형 성장을 해왔던 것이 문제지요”
브라질 룰라 전대통령
당시 815광복후 한국의 상황은 토지의 80%가 지주가 과소유를 하고 있고 자장농의 비율은 극히작았으며, 이는 지주와 소작농의 계급갈등을 물러 일으킬 수 있었다. 거기에 소작료는 5할이 넘어갔다. 기것 농사를 지어도 절반을 뜯긴다는 것이다.
정부 수립 후 파악해보니깐, 6명의 대지주가 전국 땅을 좌지우지 하고, 나머지는 사찰(절) 땅이더라.
어느 정부 관료가 토지조사이후 한말
먼저 북한의 무상몰수무상분배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1946년 3월 5일 북한에서 무상몰수 무상분배방식으로 토지개혁이 전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이 때는 북한의 소식이 여과없이 신문을 통해 남한에서 보도되었기 때문에 남한 농민들도 북한의 토지개혁 소식을 듣게 되었고, 당연히 남한에서는는 왜 토지개혁 안하냐고 불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숨어 있는데, 공산국가에서는 사유재산이라는 것이 없다.
모든 토지를 국가로 귀속 시켜버리고, ‘경작권’만 무상으로 분배를 한다는 것이다.
소작료를 내는 대상이 지주에서 정권으로 달라지는것 차이 말고는 없다는 뜻이다.
문제는 지주가 수탈하던거에 비해서 소작료가 싸지도 않다는 것이다.
무상몰수무상분배를 내걸더니 내막을 보면 논작물 수확고의 27%, 밭작물 25%에 달하는 막대한 현물세를 강요했다.
북한에서 실시된 토지개혁을 보면 애국미, 성출, 주둔소련군 식량이나 주둔비를 명목으로 뜯어가서
수취율은 50%에 다라랐으며 이는 토지개혁 이전의 수취율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한국 전쟁의 발발과 기원 : 박명림
이승만의 유상몰수유상분배로 돌아가보자
이승만은 농지개혁이 적용되는 지주들에게는 일괄적으로 국가가 유상몰수하는 대신 국가경제 발전사업 우선 참여 혜택을 내걸어서 농업과 토지에 묶인 돈을 산업발전으로 흘러가게 유도하였다.
1950년 4월부터 농민들에게 토지분배가 시작되었고, 5월부터는 토지장부 열람이 개시되었다. 드디어 농민들은 자신의 토지를 소유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토지 소유의 조건은 소작료 30% 5년 상환이었다.
5년간 30%를 5번 내면 자기 땅이 되는거랑, 북한의 조건이랑 어느것이 좋은지는 생각을 깊게 하지 않아도 알것이다.
상당수 지주들은 몰수 토지에 대한 보상으로 받아낸 지가증권 또한 한국전쟁으로 가치가 하락해 일찍 팔렸고 이는 귀속재산 불하 납입 대금으로 사용되곤 했다. 사실 한국전쟁 시기에 이미 현대의 증권 시장과 유사한 지가증권 거래소가 임시수도인 부산 광복동에 있었고, 정부에서 증권거래소 허가까지 해서 지가증권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때문에 지주라고 해도, 전쟁통의 식량 문제 때문에 지가증권을 헐값에 매각한 사례가 허다하며, 막말로 정부가 망하면 정부가 지급보증을 하는 지가증권이라고 가치가 있을리가 없기 때문에 지가증권의 가격은 더더욱 바닥을 쳤다.
돈이 없던 사람이라도 약간의 위함을 감수 해야하지만 얼마든지 토지를 소유할 수 있던 시절이 열린 것이다.
토지로 만들어진 계급제, 식민지 지주제를 한순간에 철폐하는데 성공하였으며,
5월부터 개시한 토지대장 열람을 통해 최소한 내 땅이 있으며 그게 어디에 있는가라는 인식 정도는 줄 수 있었고, 그 덕에 대한민국 정부에 충성해야 할 이유를 주었다는 것이다. 북한이 다시 점령을 해버리면 꿈에도 그리던 자작농이 된 상황에서 토지를 다시 빼앗기고 소작농이 되는 것의 공포는 상상 이상이었다.
거기에 수확량의 30%를 5년간 내면 자기땅이 된다는 사실역시 지주와 일본에게 수탈당할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후한 혜택이다.
참고로 말하면 토지개혁을 당시 야당이었던 한국민주당이 극렬히 반대했는데 지금 민주당의 전신이다. ㅋ
*한민당이 친일파, 지주 출신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