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손혜원 부친 이야기를 하면서 독립운동가에 대한 노선을 다룬 적이 있었는데
간략하게 했던 이야기가 자유시 참변 때문이었다.
요즘에는 최근에 어떤 이야기를 쉽게 써볼까 하다가.
청산리 전투 – 간도참변 – 자유시참변을
차례대로 써볼까 하는 생각으로 시작한다.
시간 순서대로 청산리전투 부터 시작한다.
다만 우리가 흔히 알고 익숙한 대첩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을 건데, 이유는 마지막에 서술 하겠다.
1920년 10월
김좌진, 나중소, 서일, 이범석 등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대한신민단 예하 신민단 독립군 등 주축으로 활약한 만주 독립군 연합 부대가
중화민국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간도에 출병한 일본 제국 육군과 전투를 벌인 총칭이다.
배경과 전개를 알아보자
일제시대가 시작된 이후 일본의 박해가 점점 심해지자, 여러 독립 운동가들은 한반도를 떠나
일부는 하와이로 가기도 했으며, 상해로 가는등 해외로 흩어졌지만
대부분의 독립군들은 한반도와 – 중국의 국경지대로 이동해서 계속해서 활동해 나갔다.
당시 일본은 제국주의의 완성을 위해서 한반도를 발판을 삼고,
중국을 무력으로 진압해서 대륙으로 나아갈 준비를 했는데
이곳이 우리가 흔히 부르는 만주다.
그리고 여기에는 만주국이라는 일본의 괴뢰정권을 세운다.
이 만주국을 세우는 과정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이 크게 걸림돌이 되었기에
소탕하는것이 목표 였으나 봉오동 전투 등 계속해서 방해를 받았기에 계획에 차질이 생기던 중이었다.
때마침 군수물자의 보급이 궁하던 독립군은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서 유럽으로 떠나는 배에 오르는 체코슬로바키아 군인들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군대가 보관하던 무기를 헐값에 북로 군정서에 판매하게 되었다.
독립군은 체코슬로바키아군에게서 매입한 무기인 권총, 기관총, 탄약 200정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간도로 수송했다.
때마침 맞아 떨어진 기회덕에 독립군은 무장을 하였다.
1920년 8월 하순,
왕칭현 서대파에 주둔하던 북로 군정서의 주력 부대는 훈춘에 있는 일본 영사관을 습격해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일본군 제14사단과, 제13사단의 일부가 장고봉을 거쳐 남하하고
제21사단이 도문강을 건너 북상하며 만철의 수비대가 송화강을 건너 서진해
북로 군정서군을 3면에서 토벌하려는 작전이 진행 중임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독립군은 대규모 병력을 상대하는것에 부담을 느껴서 정찰만 할뿐 피하였으나
김좌진 부대는 결국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해 일본군과 일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청산리 계곡은 동서로 약 25km에 달하는 긴 계곡으로서,
계곡의 좌우는 인마의 통행이 곤란할 정도로 울창한 삼림지대였다.
오전 9시경 야스가와가 이끄는 추격대가 계곡의 좁은 길을 따라 매복 중이던 이범석 부대와 교전을 벌였다.
독립군은 유리한 지형에다가 효과적인 매복작전으로 큰 피해를 주었고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으나, 의도치 않게 독립군과 일본군의 군복 색깔이 거의 비슷하여
일본군이 자기들끼리 서로를 오인 사격하는 상황이 벌어져 독립군이 손귑게 전과를 올렸다고 기록되있다.
독립신문 제88호(1920년 12월 25일자)
“적이 적군을 맹사(猛射)하니 아군과 적군에게 포위공격을 받은 적의 일대는 전멸에 빠졌는데 그 수는 약 400여 명이었다”
교육 현장과 역사학계에서는 이 전투를 독립군이 압도적인 교환비로
일본군을 물리쳤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대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고,
상당수의 사람들이 청산리 대첩이라는 표현이 익숙하다.
다만 일본의 기록과 교차 검증을 하면 조금 의문이 드는 부분이 생긴다.
일단 임시정부나, 여러 목격담에서는 1천명~3천명의 일본군을 학살했다고 증언하지만
어디까지나 증언과 목격담에 불과하며 이를 뒷받침할 증거는 부족하다.
청산리 전투 전체에 동원된 일본 병력은 후(24일 이후)에 2개 대대가 증가되었으니 2,500명을 초과하지 않았을 것인데 어떻게 1,200명 ~ 3,000명을 섬멸였다는 것일까.
― 박창욱 , 김좌진 장군의 신화를 깬다, 역사 비평, 1994년 2월, 182 – 183, 186 – 187
청산리 전역의 전개 배경과 독립군의 작전 http://www.earticle.net/Article.aspx?sn=269434
청산리 전역시 일본군의 군사체계와 독립군의 대응 http://www.papersearch.net/view/detail.asp?detail_key=59900300&code=CP00000002
청산리 전역의 전개 배경과 독립군의 작전
1920년 10월 독립군은 안도현으로 전투력을 보존하기위해 이동하던 도중에 추격하는 일본군과 조우하게 되었다. 독립군과 일본군은 청산리 일대 어랑촌을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졌고, 독립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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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역시 일본군의 군사체계와 독립군의 대응 < 논문상세 < 페이퍼서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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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전투시간, 일본군의 규모를 감안했을때 1천~3천명의 일본군을 학살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고 하는것이다.
또한 일본측의 문서를 살펴본다면 일본군이 청산리전투에서의 일방적인 참패를 감추려고해도,
군사의 실질적인 공백은 숨길 수 없기 때문에 본국으로 부터의 증원 요청, 군사재편 등이 있을것인데, 그런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일본측 주장에 따르면 일본인 사상자를 전사 11명, 부상 24명으로 파악하는데 일본 제 19사단 사령부의 보고서를 근거로 발표한 것이며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전사자 명부와 일치한다.
“청산리 전투 기록, 과대평가 가능성 고려해야”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역사비평’ 기고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3·1 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듬해인 1920년 10월 만주 청산리에서 벌어진 독립군과 일본군 간 교전은 독
우리가 일본군을 상대로 이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 규모에 대해서는 정확한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