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작품 베니스의 상인, 샤일록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베네치아가 있다.
*베네치아와 베니스의 차이는 언어이다. 같은말이라는 뜻
이탈리아어: Venezia(베네치아) 영어: Venice(베니스)
지금은 이탈리아의 어느 아름다운 항구도시 였지만 중세시대에는 누구보다 막강한 부와 권력을 가졌으며
그때 당시 유럽의 강자 프랑스 조차도 베니스 도시 앞에는 힘을 쓰지 못하였다.
어떻게 일게 항구도시가 그런 권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이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원래 전 세계의 패권을 가진 나라는 지금의 중국이다.
전세계 생산량의 70%는 동양에서 나왔으며, 중국에서 화약과 지도, 나침반등을 발견하고 개발할때에 유럽은 봉건사회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지식이나 생산등에 대해서는 동양에 한참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런 차이를 역전하고 좁힐 수 없는 거리를 만들어 버린 것은 바로 바다이다.
다시 베네치아로 돌아가자.
당시 중세 유럽에서 세계로 나아가는 길목이라고 할 수 있는 지중해는(반대편은 미개척항로) 오스만 제국이 꼭 잡고 있었다. 여기에 유럽은 오스만과 종교적인 대립으로인해서 지중해를 자유롭게 통과할 수 없었고, 베네치아 상인은 이집트를 점령한 터키인들에게 막대한 돈을주고 무역을 독점할 권리를 샀다.
동방무역의 대부분”베네치아”에 의존 할 수 밖에 없는 형태였다.
베네치아는 본래 척박한 땅과 늪지대로 인해서 생산성이 거의 없는 땅이 었기 때문에 유일하게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자신의 물건이 없더라도 할 수 있는 무역, 중개업이 었다. 그래서 상인, 은행등 무역과 금융업이 크게 발달한 도시였다.
심지어 무역을 장려하기 위해서 자기 자본없이 100%대출해서 무역업이 가능했고 그중에서 은행이 85%의 이익을 가져갔다. 그래도 15%만 가져가도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너도나도 무역, 상인을 하였다.
아무튼 이런 베네치아는 무역업과 지리적인 특성으로 강력한 해군으로 지중해의 패권을 잡고 쌓아올린 부를 이용해서 오스만제국으로 부터 향신료 무역 독점을 부여 받았다.
당시 베네치아 국력은 인구 150만에 불가 했지만 구가 수입은 프랑스 전체 5배, 선백 3,300척, 선원 36,000으로 유럽 최강의 해상 도시였으며 국가였다.
이 모든 것이 아시아와의 중개 무역을 통해서 구입한 향신료 후추를 유럽에 독점 공급하면서 일궈낸 성과였다.
동양에서 온 선물 후추, 당시 후추의 가격은 사파이어반지 2개, 돼지 15마리, 말3마리와 같은 가격이었다.
한마디로 검은 황금이었다.
이런 향신료 후추는 유럽에 빠질 수 없는 식재료가 되었고 귀족들의 열렬한 러브콜과 함께 몸값은 치솟았다.
당시 유럽의 부와 권위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도 된다.
베네치아는 후추와 향신료 동양으로 들어오는 모든 제품의 70~80%의 유통 경로였으며
무역으로 굉장한 이익을 거두며 부를 쌓고 있었지만 다른 나라가 이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았다.
인도를 발견하다
포루투칼은 독점 무역을 깨기 위해서 한가지 모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모험으로 유럽의 변방국은 한때 세계를 호령하게 된다.
바스코 다가마 이 한사람으로 역사가 바뀌게 된다.
그는 당시에는 미쳤다고 생각하는 계획을 꺼내는데 바로
오스만, 아랍이 장악하고 있는 지중해 대신, 아프리카를 통해서 인도로 가자는 것이다.
그리고 배 4척, 선원 400명을 이끌고 긴 여정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그때 당시 어떻게 하면 장거리 항해를 할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해안아가 섬에 보급기지를 세운다면 오랜 항해를 마친 상선의 보급과 선박의 수리와 선원 보충, 폭풍우가 올때는 피난처가 될 수 있으며 해적이나 적대세력으로 부터 방어가 가능하며, 창고 역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무인도인 카보베르테와 상투메 프린시페와 페르난도섬 해안가에 가까운 루안다나 소팔라 코친 켈리컷 고아 말라카 마카오등이 포르투갈의 보급기지가 되었다.
여기서 부터는 포루투칼의 식민지 이야기로 빠지는데 다음 게시글을 참고하면 된다.
아무튼 원정은 70명만이 생존한체 인도의 대규모 항구, 캘리컷에 도착을 하게 된다.
다가마 상단은 굉장히 놀라는데, 향신료의 다양함과 수량이었고, 항구의 규모였다.
캘리컷은 인도의 변방도시에도 불구하고 포루투갈의 수도인 리스본보다도 크다고 기록 했다.
바스코 다가마 상단은 어렵게 도착한 인도에서 왕을 만나기를 요청하고 알현 할 수 있었다.
각종 보서고가 외투, 투구, 설탕등의 선물을 왕에게 하지만 포루투칼보다 훨씬 뛰어난 가공기술을 가지고 있던 인도 입장에서는 우수운 것들이다.
아시아의 무역
이번에는 아시아로 가보자, 당시 무역의 최강자는 아시아였다.
명나라대의 이르러 “정화의 대원정”을 통한 바다의 개척이 이루어지던 시절이 있었다.
300여척의 함선과 2만8천명의 선원으로 출발한다.
당시 원정대 규모는 세계1차대전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인류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선단이었다.
세부적인 사항으로는 말을 싣는 마선, 식량을 싣는 양선, 식수를 싣는 수선 등의 기능성 함선까지 동원된 그야말로 대선단
대선단의 제독인 정화의 배는 길이 150m, 폭이 60m, 8천t의 거선이었는데 이런 거선이 무려 62척이었고,
선단의 선원이 하루 소비하는 식량은 쌀100가마니였다고 한다.
장장 18000km를 이동했으며, 다가마 선단보다 50년이나 이르게 출발했지만
그 기술은 훨씬 우월했고, 그 규모는 약 100배에 이른다고 한다.
명나라의 황제를 과시하고, 그들의 중화 사상을 퍼트리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선단에는 상아, 비단, 도자기, 향신료 등의 진귀한 품목의 보물과 무역품이 실려있었다.
인도는 아라비아반도와 인도반도 그리고 중국의 무역상들이 모두 모여드는 사실상 세계무역의 중심지였고,
아라비아 상인들은 극동지역인 신라의 경주까지도 진출할 정도의 해상무역이 활발했었다.
반면에, 이제 갓 아시아에 진출한 포르투갈은 이 무대에서 주변인에 불과했었고, 국운을 건 일대의 승부를 걸기 시작 한다.
디우 해전
중동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아랍에미리트 역시 조그맣지만 신속성이 좋은 “디우선”이라는 배를 타고 1500km이상의 해역에서 거리를 하는데 언젠가는 인도양에서 포르투갈과 패권 싸움이 일어 날 수 밖에 없었다.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바다위의 실크로드를 누비며 중국 쿠웨이트 오만까지 항해했던 상인들의 종착역은 신라 경주였다.
총포 외에는 인도의 상품보다 우월한 것이 없던 포르투갈상인은 결국, 총포로 인도의 무역시장을 제압하기로 결정 한다.
인도의 서북부 디우 해역에서 벌어진 “디우 해전” 은 인도지역에서 일어난 국지전에 불과했지만,
향후 해상무역의 헤게모니를 바꾸는 큰 기점이 되었다.
유럽의 화포로 무장한 포르투갈의 카락선 18척과 “원거리 포격이 가능”
그에 대항하는 노를 저어서 충파 전술을 구사하는 아랍연합 갤리선 100여척은 디우 해역에서 격돌하게 된다.
상대방은 수적우위를 믿고 그대로 돌격하였지만
화약무기와 전술을 통해 수배나 되는 적을 격파한 포르투갈상인들이 거머쥐게 되었고,
추후 인도시장에서 큰 축을 담당하게 되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비록 동양과 다른 세력보다 여러가지로 부족하였지만
“총과 화포”라는 화약무기의 우월로 인도 무역을 제패하는 위업을 기록한다.
포르투갈의 고리
디우해전을 통해서 인도양의 패권을 잠식한 포르투갈은 인도의 도시인 “고아” 에 요새를 건설하여,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각지의 무역거점을 잇는 하나의 카르텔을 형성하게 되고, 이를 “포르투갈의 고리” 라고 명명한다.
무력으로 복속시켜서 지배한다.
이런 아프리카 – 아라비아 – 인도 – 동남아를 잇는 카르텔은 포르투갈에게 향신료 무역의 독점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는 베네치아의 독주를 막고, 유럽중개권을 가져오게 되면서 역사상 유래없는 번영을 하게 된다.
중국의 발견
총과 화포로 무장한 포르투갈의 상인은 아랍과 인도를 정복하고, 이제 신비의 나라 “중국” 까지 진출하려는 야심을 품게 된다.
포르투갈은 1553년 마카오를 정복하고, 400년간 식민지로 삼아서 중국으로 진출하려는 교두보로 삼았다.
무력으로 아프리카-아라비아-인도-동남아를 정복해나가던 포르투갈은 드디어 세계최강의 대국 “청나라” 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포르투갈의 전권대사인 “토메 피레스” 는 고대하던 청황제를 알현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청황제는 조공국이던 믈라카가 포르투갈에게 정복당해서 더 이상 조공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진노하였고,
하던대로 하면 중국마저 정복가능하리라고 믿었던 피레스 사절단은 어이 없이 감옥에 수감되는 모욕을 겪게 된다.
피레스 사절단의 기록은 약 2년간의 내용이 없는데, 아마 2년간 수감되었던 것으로 사료 된다.
바다의 제국과 육지의 제국
포르투갈은 유럽의 그 어떤 국가보다 먼저 인도에 도달하여, 그 기반을 중심으로 중국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고리와 같은 카르텔을 중국까지는 신장시키지 못하였고, 그 세력은 결국 인도양과 동남아 해역으로 한정되었다.
아직까지는 대항해 시대의 초기였고, 유럽의 국가들은 해상권을 장악하는데에도 애를 먹어 각 거점의 요새화가 겨우 진행되었기 때문에
오스만트루크의 아라비아나 무굴제국의 인도 그리고 중국의 청나라 같은 내륙의 거대세력에게는 힘이 닿지 않는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