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아직도 이 사건에 대해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고
이 시대를 이끈 리더들이 현재 일본의 위인으로 남아 교육되고 있는게 현실이다.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 드라마에도 수차례 소재로 쓰였고, 후쿠자와 유키치 초상은 일본 1만엔권에 있다.
주변국에 악영향을 끼쳤지만 일본 자국의 입장에선 성공한 역사이기 때문에
난 이 글을 쓰기에 앞서 조선의 입장, 일본의 입장을 철저하게 배제하여 3자의 입장으로 써보고자 한다.
메이지 유신은 우리나라 교과서에도 흔히 나오는 일본의 개혁으로
에도막부가 서양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쿠로후네 사건으로 인해 조약을 체결하자
이로인해 막부 타도세력과, 왕정 복고세력에 의해 막부가 무너지고,
1868년 덴노(천황) 중심의 근대국가로 이룩한 사건을 말한다.
이때는 미국은 남북전쟁이 일어나고 20~30년 만에 군국주의 무력을 앞세우며 동아시아의 한축으로 도발을 하기 시작한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이시기에 일본역시 두파로 나누어 지며 전자는 유교적인 사상으로 무력 군국주의에 대한 반대와 후자는 힘으로 주변국을 쳐서 정복하자는 파로 나누어 지는데 물론 후자가 힘을 얻게 된다.
“조선은 아시아주의 일소야만국으로서 그 문명의 상태는 우리 일본에 미치기에는 너무 멀리 뒤떨어져 있다.
이 나라와 무역을 해서 이로울 것이 없다.
이 나라와 교류해서 우리가 얻을 것은 하나도 없다.
학문은 받아들이기에 부족하고 그 병력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
가령 그들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의 속국이 된다고 해도 반갑지 않은 나라다.
그러므로 조선과의 교제가 우리의 희망대로 이루어진다 해도 그것은 일본의 독립을 위한 권세를 강화하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조선국은 사지가 마비되어 스스로 움직이는 능력이 없는 병자와 같다”
“조선과 중국 이 두 나라는 진보의 길을 모르고 구습에 연연하며 도덕마저 땅에 떨어진데다가 잔혹, 몰염치는 극에 달하고 거기에 오만방자하다”
“우리 일본은 동양의 선구자이자 우두머리로서 지나와 조선을 유도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무력으로 협박하는 것이 필요”
“조선은 실로 일본에 있어 성가신 국가이다”
후쿠자와 유키치 「탈아론」 1885년 3월 16일
만엔권에 나와있는 “후쿠자와 유키치” 이 사람은 일본의 근대 사상가, 교육가 이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에게 있어 개벽과도 같은 개혁이였다.
메이지 유신의 전, 후가 완전히 뒤바꼈다. 흔히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게 바꼈다고 생각하면 될것이다.
우리가 어릴적에 보던 만화 ‘바람의 검심’ 의 주 배경이 되는것도 막부 말기~메이지유신 시대이다.
켄신이 과거 유신지사로써 활동한것도 막부세력을 암살하는 지령을 받아 발도제로 활동한게 이 배경이다.
원래는 분명 존왕양이 (천황을 지키고, 외세를 배척하자) 가 목적이였던 메이지 유신이 왜 달라졌는가?
원래는 덴노를 중심으로 조선처럼 쇄국정책을 하고자 진행했지만 중간에 그 방향을 틀었다.
메이지 유신의 정변을 주도한 세력이 사쓰마 번, 조슈 번 이 두 세력이다.
근데 이 사쓰마 번 소속 무사가 사소한 무례를 이유로 영국인 상인을 살해한 것이 계기가 되어서
사쓰에이 전쟁을 벌였는데 일본은 여기에서 참패를 하게되고
일본의 국력과 서구 열강의 국력의 차이를 실감하고 방향을 틀어서 개국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깨닫게 된것이다.
이에 일본은 이와쿠라 토모미 (메이지 유신의 흑막), 이토 히로부미 (후일 조선 초대 통감) 등 대규모 사절단을 외국에 파견하여
외국 문물들을 직접 보고 견학을 하여 많은걸 배워왔다고 한다.
이들이 내련 결론이 바로 전면 개방 외엔 답이 없다는 결론이였고 일본은 폐번치현, 신분제 폐지, 국민개병제 등
전면 서양화에 착수했다.
결과론적으로만 보면 일본이 옳았던게 체제하의 개혁을 추진했던 (양무운동, 변법자강운동) 중국은 반식민지 종속국이 되었고
조선은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을 했기때문이다.
이 동북아의 혼란의 시대에서 일본만이 살아남을수 있었던 이유가 맞기도 하다.
메이지 유신의 성공은 일본이 근대 이전부터 수차례 제창되오던 정한론(조선을 정벌하자) 이 힘을 얻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탈아론과 정한론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도 된다.
탈아론이라는거 자체가 아시아를 탈출하여 서구 유럽에 이룩하자 라는 이론이였고
탈아론을 제창하게되면 필연적으로 정한론으로 귀결이 될수밖에 없다.
(한반도의 위치를 보면 대륙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한론에 의해 조선을 얻은 일본은
만주를 정벌하고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태평양 전쟁까지 일으킬수밖에 없는 이른바 폭주상태에 이를수밖에 없다.
후쿠자와 유키치, 이 사람은 일본 우익의 토대가 되는 인물이다.
탈아론이라는건 앞서서 설명한 후쿠자와 유키치가 제창한 것으로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아시아(동양) 에서 벗어나 유럽(서양) 의 사회문화를 받아들이고 지향한다.
라는 이론으로써 여기에서 언급되는 조선과 청나라에 대해 후쿠자와 유키치는 강도높은 비판을 가하는데
후쿠자와 유키치에 의하면 이들은 문명을 거부하고 보수적인 사상과 망상에 빠진 나쁜친구들 이라면서
이들을 배제하고 일본 먼저 발전하자, 그리고 빨리 성공해서 저 미개한 친구들을 도와주자고 했다.
능지처참 당한 김옥균, 사진은 그의 수급이다. 한자는 “대역부도옥균”
특히 후쿠자와 유키치가 지원하던 조선 내 개화세력 급진개화파(김옥균 외) 이들의 세력의 갑신정변이 삼일천하
실패로 돌아가고 조선정부는 갑신정변의 주모자 김옥균의 삼족을 멸해서 능지처참했다.
어차피 김옥균이 살아있다 하더라도 그의 동료들이 전부 친일파로 돌아섰던것 처럼 그 역시 친일파로 돌아섰을거다.
여튼 이에 대해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의 근대화를 포기하자라는 탈아론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게 정설이다.(조선은 답이 없는 나라라 스스로 개혁을 하지 못한다)
당연히 당시 조선의 위정척사파 로써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이와 같은 주장을 매우 불쾌히 여겼다.
어쨋든 메이지유신으로 발전한 일본은 서구열강의 막차를 타서 제국주의 식민지 쟁탈전에 참가하였고
조선과 청나라는 서구열강과 일본의 재물이 되어버린 안타까운 결과를 낳게된다.
조선이 왜 메이지유신과 같은 개혁을 하지 못했는가에 대해선 몇가지 의견이 있는데 써보자면.
1. 조선 수뇌부 자체가 근대화에 회의적인 세력이였다.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던 독립협회에 반해, 고종은 전제왕권을 빼앗기기 싫어했다.)
2. 근대화를 실행할만한 국내 기반이나 세력이 없었다.
(갑신정변에 대해 일본세력을 이용했던 급진개화파, 이를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를 개입시켰던 명성황후, 어차피 둘다 외세에 의존했던것이다.)
3. 만연된 세도정치로 인해 국내 정치가 이미 붕괴되어 있었다.
4. 고종 역시 체제 내의 개혁을 원했다. 따라서 갑오개혁이나 광무개혁과 같은 개혁을 실시했지만 중국의 패배와 같은 맥락으로 이 개혁들은 실패한 개혁이다. 더구나 이 개혁은 외세의 영향이 없지않은 개혁이었다.
*애초에 대한제국으로 개혁을 했을때는 일본보다 30년이 늦은 시점이었다.
5. 근대화 이전 조선과 일본 국력만 비교해도 일본이 4배가 더 높았다. 조선과 일본은 농업국가였다. 때문에 국토면적에 따라 인구수가 차이가 날수밖에 없는데, 일본에 미개척지가 많았다곤 하나 조선 역시 4군 6진, 개마고원과 같은 북부 지역은 불모지였다. 경제력 역시 일본에 있어 유리했던게 이유로 꼽힌다.
6. 과연 사카모토 료마나 후쿠자와 유키치같은 선구자가 조선에 있었다면?
– 급진개화파와 같이 숙청되었을거라 예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