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버트 피쉬
1870년 5월 19 ~ 1936년 1월 16일
최소 17명의 아이들을 살해, 식인을 한 살인마 (본인 주장에 따르면 100명 이상)
전기 의자에 앉아 사형 당하는 알버트 피쉬
밑은 그레이스 라는 10세 소녀를 살해, 먹어 치운 뒤 가족에게 보낸 편지
“친애하는 버드 부인께
1894년, 제 친구 하나가 존 데이비스 선장이 이끄는 증기선 타코마 호에서 선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차이나의 홍콩으로 항해했지요. 도착 후 제 친구는 동료 두 명과 함께 육지에 올라가 술을 마셨죠. 그리고 돌아왔을 때 배는 이미 떠나고 없었습니다.
당시 차이나는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죠. 고기라는 건 종류를 막론하고 한 파운드 당 1달러에서 3달러 정도는 줘야만 살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은 너무도 심한 것이어서, 그들은 결국 굶어 죽지 않기 위해 12살 미만의 모든 아이들을 음식거리로 내다 팔았습니다. 14살 미만의 어린 아이들은 안심하고 길을 다닐 수가 없었죠. 어느 가게든 들어가서 스테이크나 스튜(역주 : 재료를 한데 섞어 소스 팬에 넣고 장시간 푹 끓여 만드는 서양식 찌개 요리)를 해먹을 고기를 살 수가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의 잘려진 신체 일부를 가지고 나와서 원하는 부위를 잘라주곤 했지요. 얇게 썬 송아지 고기처럼 팔리던 아이들의 엉덩이 고기는 맛이 가장 좋았기 때문에 값도 제일 비쌌습니다.
제 친구 존은 그 곳에 머무르면서 인육의 맛을 알게 되었죠. 뉴욕으로 돌아오면서, 그는 각각 7살과 11살인 소년 두 명을 몰래 잡아서 데려왔습니다. 자기 집에 데려가 옷을 벗기고는 묶어서 옷장 속에 가두었죠. 그리고 아이들의 소지품을 모두 태웠습니다. 친구는 날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몇 차례씩 아이들을 때리고 고문했습니다. 그래야 고기가 부드러워지고 맛있어지니까요.
친구는 우선 11살짜리 아이를 먼저 죽였는데, 왜냐하면 그 아이의 엉덩이가 더 살이 쪄서 살점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친구는 머리와 뼈, 내장을 제외한 모든 신체 부위를 요리해서 먹었습니다. 엉덩이 살은 모두 오븐에 구워 먹었고, 나머지는 끓이거나, 익히거나, 튀기거나, 스튜 요리를 해서 먹었습니다. 다음 차례는 7살짜리였고 같은 방식으로 해먹었죠. 당시 저는 100번가 동쪽 409번지, 그러니까 바로 옆에 살고 있었습니다. 친구는 사람고기가 얼마나 맛있는지를 종종 말해주었고 저도 한 번 먹어봐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죠.
1928년 6월 3일, 저는 15번가 서쪽 406번지에서 부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치즈 항아리 1개와 딸기를 선물로 가져 갔구요. 우리는 점심을 함께 먹었습니다. 그레이스는 제 허벅지에 앉아서 저에게 키스했지요. 저는 그 아이를 잡아먹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레이스를 파티에 데려가겠다고 했을 때 말인데요. 아이에게 가도 좋다고 허락한 건 부인입니다. 저는 미리 준비해 둔 웨스트체스터(Westchester)의 빈 집에 아이를 데려갔죠. 집에 도착한 후 저는 그레이스에게 밖에서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는 들꽃을 꺾고 있더군요. 저는 위층으로 올라가서 옷을 모두 벗었습니다. 안 그러면 아이의 피가 옷에 묻을 테니까요.
준비가 끝나자 저는 창문으로 가서 그레이스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방에 들어올 때까지 옷장에 숨어 있었죠. 그레이스는 저의 벗은 몸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더니, 계단 쪽으로 달려가 도망치려 하더군요. 제가 잡아끌자 엄마에게 이르겠다고 말했죠.
우선 저는 아이의 옷을 벗겼습니다. 어찌나 발길질을 하며 물고 할퀴던지. 저는 목을 졸라 아이를 죽인 후, 살점을 제 집으로 옮기기 편하도록 시신을 여러 조각으로 잘랐습니다. 그리고 요리해서 먹었죠. 아이의 작은 엉덩이 살을 오븐에 구워 먹었는데 그렇게 달콤하고 부드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다 먹어 치우는데 9일 걸리더군요. 아이를 겁탈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는 하지 않았습니다. 따님은 처녀로 죽은 겁니다.”
알버트 피쉬는 이 편지를 보낼 때 사용하던 편지봉투와 편지지에 새겨진 “뉴욕 민간 택시기사 복지연합회” 의 약자가 단서가 되어 체포, 사형 판결을 받은 뒤 전기 의자에서 사형당함.